[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6. 아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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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형 태걸.태일과 필자(왼쪽부터)의 어린 시절 모습. 필자가 왜 여자옷을 입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해가 바뀌어 나도 이제 우리 나이로 칠순이다. 인생무상이라더니 70 평생이 스크린에 비친 그림자처럼 그렇게 덧없이, 움켜잡을 건더기 하나 없이 흘러버린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느 의사는 7부 능선에서 삼림욕을 하면 건강에 좋다고 했다. 그곳에 선 나무들이 사람에게 좋은 향기를 가장 많이 내뿜는다는 것이다.

인생의 일곱 굽이에서 난 과연 어떤 향기를 풍기고 있을까, 새삼 옷깃을 여미게 된다. 임권택 감독은 영화 '축제'에서 늙는다는 건 어린 아이로 되돌아가는 것이라 했는데, 요즘은 내가 겪은 숱한 일 중에서도 빛바랜 소년 시절의 일이 자주 떠오른다.

옥색 저고리에 연분홍 치마를 입은 여인이 동네 어귀에 나타났다. 먼발치에서 그녀를 알아본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펑펑 울어댔다. 울음이 잦아들자 그녀가 그 어여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귓가에 속삭인다. "태원아, 가자. 가서 엄마랑 함께 살자."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한 이듬해인 1946년 어느 날 아버지가 부르셨다. 언제나처럼 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희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고 한다. 내가 말렸지만 계속 고집을 피우니 어쩔 수 없다. 원칙적으로 넌 아버지와 살아야 한다. 하지만 엄마를 따라가겠다면 붙잡지 않겠다."

늘 그랬듯 냉랭하고 단호한 말투였다. 이제 갓 초등학교 4학년이 된 열한 살의 아이에게 그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적어도 "아버지랑 사는 게 어떻겠니"하는 정도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해 줄 수 있을 텐데도 당신은 감정의 거리를 유지한 채 어린 아들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자식이 열셋이나 딸려 있어 하나쯤은 어찌 되든 상관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는 보지 않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게 어디 있으랴. 그건 아버지의 스타일이었다.

평양 서천의 대지주였던 집안 덕에 아버지는 일본 주오(中央)대 경제학과를 나왔을 만큼 인텔리였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다. 일부다처(一夫多妻)가 큰 흠이 아닌 때여서 부인 둘을 사별한 아버지는 다시 잇따라 두 명의 아내를 맞았다. 나는 마지막 부인에게서 난 네 아들 중 막내였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따뜻한 정을 나타내는 데는 인색했지만 당당하고 원리원칙에 충실한 분이셨다.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란 갔을 때 일이다. 생계가 막막해진 아버지는 형과 나를 데리고 국제시장에서 땅콩을 팔았다. 생땅콩을 받아와 불가마에 볶고 깨끗이 닦은 뒤 소매상에게 되파는 일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땅콩 자루를 들쳐 메고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입에는 상아 파이프를 물었지만 옷차림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때 밍크 칼라가 달린 코트에 중절모자를 쓴 신사 두 명이 스치고 지나갔다. 몇 걸음 지나쳤던 아버지는 되돌아서더니 그들을 불러 악수를 하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는 헤어졌다. 지금 그 모습을 떠올리면 나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잘 나갔던 사람이 자신의 남루해진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고 옛 동료를 일부러 불러 세우면서까지 아는 체한다는 건 웬만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하는 일인데 뭐가 어때"라는 두둑한 배짱을 갖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결국 어머니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의 깊은 속정에 더 끌렸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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