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내가 벌써 이렇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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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 푸념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얼마 전 일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무심히 한구석에 가서 섰더니, 아 글쎄 자리에 앉았던 젊은 친구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생전 처음-정말 처음입니다-당하는 일에 오히려 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시쳇말로 완전히 쇼크를 먹었습니다. 자리를 내주는 젊은이에 대한 고마움보다는 "아니 내가 벌써 이렇게" 하는 탄식이 앞섰던 것이지요. 그 뒤 지하철을 타면 저는 반드시 출입문 쪽을 고수함으로써 타인의 좌석 점유권 약탈을 원천적으로 피하려는 신사도(?)와 또 그렇게 늙지 않았다는 깡다구(!)를 한몫에 과시하고 있습니다.

인류 재앙의 고령화 사회

그런 처지의 저에게 최근 책이 한 권 도착했는데, 피터 피터슨의 『노인들의 사회:그 불안한 미래』(에코리브르·2002)라는 책이었습니다. 이러한 책이 나왔으니 한번 읽어보라는 의도겠지만 지하철 쇼크 이후의 제 심사로는 마치 당신 같은 노인이 꼭 읽어야 할 책이어서 보낸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김이 샜겠습니까? 며칠 뒤에 또 한 권이 당도했는데, 얼씨구 이번에는 로저 로젠블라트의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 58』(나무생각·2002)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아니 이것들이 누구 기 올리기로 작정을 했나? 그러나 그럴수록 투박한 감정 표출은 금물이어서 오냐 그래 읽어주마 하고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제 기분이야 어떻든 일면식도 없는 두 출판사가 책을 보내준 성의가 고맙기도 하고요. 남들은 산으로 바다로 휴가가 한창인데, 젠장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노인 연구라니….

피터슨이 제기하는 고령화 사회, 그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지구 온난화 위험은 수 백년 뒤의 걱정이지만 인구 고령화 위기는 불과 30년 뒤의 확실한 현실이어서, 일례로 1970년대 선진국 인구의 중간 연령은 35세였으나 2030년이 되면 55세로 늘어날 전망이랍니다. 지금 거리에서 마주치는 행인 일곱 중의 하나가 65세 이상의 노인이지만, 그때는 셋 중의 하나로 는다니 앞으로 세상이 아주 느릿느릿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어린이 분유보다 머리 염색약 소비가 앞서는 사회, 아기 기저귀보다 요실금 팬티가 더 팔리는 사회, 청소년 캠프 대신 효도 관광이 줄을 잇는 이런 사회가 선뜻 내키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 요양 시설 확충을 강력히 요구하는 노인들의 발언권 증대로-압도적인 투표율로-첨단 무기 개발 투자가 지연되는 행운이 따를 수도 있답니다.

고령화 사회가 경제적으로는 거의 '재앙' 수준이랍니다. 현재는 납세자와 연금 수혜자의 비율이 3:1 정도지만 2030년에는 1:1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는데요. 그럴 경우 연금과 의료비 지출이 국내총생산의 30%에 이른다니 나라가 무슨 수로 그 비용을 당합니까? 연금 보험료는 꼬박꼬박 떼어간 정부가 그때 가서 돈 없으니 일찍 죽으라고 고개 돌릴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출산을 늘려 납세자를 늘리거나, 은퇴를 늦춰 연금 지급을 늦추자는 저자의 조언에는 여성 단체에서 노동조합까지 모두가 길길이 뛸 테고 말입니다. 외국인 투자 유치처럼 연금 지급을 위해 외국 저축을 끌어들이는 길이 있으나, 저자는 "미국이 한때 중국에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인권 정책의 개선을 요구했던 것처럼, 중국은 미국에 돈을 빌려주면서 메디케어(medicare)의 시정 명령을 내릴까"(3백16쪽) 하고 한방 먹입니다. 2030년 이전에 은퇴할 노인은 물론 그때까지 세금과 보험료를 깔축없이 내야 하는 현역들이여, 지금부터라도 냉수 마시고 딴 주머니 차시라.

로젠블라트의 책은 "늙기도 설워라커든" 조의 한탄이 아니라, 기왕 늙을 바에는 이렇게 한번 늙어봐 식으로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글쎄 나이 드는 것이 유쾌할 리야 있겠습니까마는 책을 읽는 도중 가끔 낄낄거린 것은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단골 가게 주인, 미화원, 목사, 시누이, 하다 못해 당신이 키우는 개마저 당신 몸무게가 늘어난다고, 당신이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당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라는 글을 읽고 세상의 어느 누가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저자는 "하지만 장담하건대 당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다.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15쪽) 하고 놀란 가슴을 달래줍니다.

5분도 못가는 행복 위해

이렇게 심각한 얘기도 나옵니다. "그들은 가정을 바꾸고, 직업도 바꾸고, 성형 수술로 자신의 얼굴도 바꾸고, 심지어 국적도 바꾼다." 도대체 왜? "무언가 대단하고 실질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5분도 못 가는 행복을 회상하고 그 순간을 마치 영원 불멸한 것처럼 재창조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1백33쪽). 그래 5분도 못 가는 젊음을 영원할 것으로 믿고 지하철에서 오기를 부리는 저는 얼마나 잘못 늙고 있는 것입니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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