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속 수사 원칙 언제 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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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말 후배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이명재 검찰총장 집에 불쑥 전화를 걸었다. 몇마디 인사를 건넨 뒤 집 앞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함께 맥주라도 한잔 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총장의 대답은 "NO"였다. (전·현직 검찰간부들에 대한)수사가 진행 중이니 다음달에 보자고 했다. 총장을 안 지가 20년이나 됐는데 이날의 답변은 다소 의외였다.

10여일이 지난 뒤에야 총장이 7월에 보자고 한 까닭을 짐작할 수 있었다. 7월 11일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광주고검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 방침이 발표된 직후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아마도 자유인의 몸으로 만나자는 뜻이었으리라. 검찰 간부들의 설득 등으로 사표를 철회했지만 그가 진작부터 옷을 벗겠다는 생각을 굳혀왔다는 게 주변사람들의 얘기다.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취임한 총장은 왜 검찰을 떠나려 했을까. 그는 미리 준비한 발표문에서 "검찰의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드린데 대해 국민에게 사과드린다. …검찰 조직이 하루 빨리 아픔을 딛고 신뢰받는 국민의 검찰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선 새로운 지휘부와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가 말한 '내부의 아픔'은 무엇인가. 아마도 愼전총장 등의 처리에 따른 자괴감과 처벌 강도를 둘러싼 조직원간의 내부 갈등이었을 것이다.

검찰이 愼전총장 등을 불구속 기소하자 일부에선 '제 식구 감싸기'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들의 구체적인 수사 결과를 알지 못해 검찰의 이번 처리가 적절했는지, 아니면 '제 식구 감싸기'나 '관행을 무시한 여론몰이식'이었는지 말할 처지는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사기관의 구속과 불구속 기준이 무엇이고, 경계선이 어딘지 딱부러지게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다.정치적 사건에선 그 한계가 더욱 모호해진다. 형사 처벌의 경중(輕重)을 받은 돈의 액수만으로 정할 수는 없겠으나 몇백만원의 뇌물을 받은 공무원이 구속된 반면 수억원을 챙긴 정치인이 불구속된 사례가 적지 않다.

검찰이 진정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도 이번 일을 불구속 수사 원칙을 정착시키는 계기로 삼길 기대한다. 불구속 수사 원칙이 확립될 경우 특정인의 구속 여부로 검찰 내부가 진통을 겪는 일도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 우리나라의 구속자 점유율(전체사건 인원 중 구속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대검 자료에 따르면 1993년 7.8%(1백86만여명 중 14만5천여명)이던 구속인원 점유율은 98년 5.8%(2백34만여명 중 13만5천여명)로 낮아졌고 지난해엔 4.2%(2백42만여명 중 10만1천여명)로 떨어졌다. 하지만 97년부터 2000년까지 4년 동안 전체 구속자(47만6천여명) 가운데 기소돼 실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24% 가량인 11만5천여명에 불과하다. 체포 뒤 수일 내로 죄질에 따라 70~90%가 풀려나는 미국 등과는 차이가 있다.

법전 속에 죽어 있는 불구속 수사 원칙을 살려내려면 무엇보다 법집행·법적용의 공정성이 담보돼야 한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면 불구속 수사는 강자를 위한 보호장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재임 중 강자의 말과 약자의 말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내린 판결은 어느 새 강자에 편든 것이었고, 약자편을 들었다고 느낀 것은 뒤에 보니 중립이었다"고 한 미국의 유명한 연방대법관 벤저민 카도조의 퇴임사는 사법기관 관계자들에게 주는 좋은 충고다.

아울러 현재와 같은 '구속=유죄'라는 국민 의식도 '확정판결 전=무죄'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피의자를 불구속 수사하자는 것은 아니다. 증거가 확실한 흉악범죄자는 수사단계에서부터 격리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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