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치 아픈 현대미술 관객에게 더 가까이… 그림에 눈을 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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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현대미술은 미술이 오랫동안 누려온 '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란 속담을 '아는 것이 곧 보는 것'이란 말로 뒤집어버렸다.

화가들은 이론을 만들어 내기에 골몰했고, 그 뜻을 알지 못하는 대중은 불청객이 되었다. '보기' 위해서, 이론가들이 내놓은 공식적이고 권위 있는 말씀을 따로 공부해야 하는 모순이 20세기 현대미술, 특히 서양 현대미술을 지배했다. 미국의 평론가 톰 울프는 그래서 1970년대 중반에 "21세기 사람들(은)…'말씀이 그려진 회화의 시대'를 돌이켜보면서 얼마나 낄낄대고 웃어대고 놀라워할 것인가!"라고 내다봤다.

21세기 들머리에서 이 예언이 얼마나 맞아떨어지고 있는가 확인하는 일은 아직 이르지 싶다. 다만 서양 현대미술을 들여오고, 따라가고, 번안하는 과정에서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한 한국 현대미술에는 앞으로 찾아나서야 할 우리 미술의 한 지침이 될 만한 말인 듯하다.

9월 1일까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의 시작 Ⅳ-열린 미술'에는 현대미술에서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를 좁히고 싶어하는 작가들 11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미술체험으로 관람객들과 만나고 싶어한다.

판화가 하동철씨는 요즈음 탁본에 푹 빠져 있다. 탁본은 우리 조상들이 중요한 유물의 원형을 남기기 위해 일상에서 쓰던 기록 보존의 한 방법이었다. 하씨는 동전, 열쇠, 하수구 뚜껑 같이 생활 주변에 흔한 사물들과 이제는 골동품이 돼버린 기물들을 골라 습기 먹은 한지를 덮고 먹방망이로 두드려 탁본한 뒤 작가가 느낀 점을 제목으로 붙였다. 제작 방법도 누구나 따라할 수 있을 만큼 쉽다. 오목볼록한 물건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로 문지르는 '프로타주' 기법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낯익은 사물이 약간의 변형을 거쳐 보여주는 새롭고 신기한 풍경은 시각 체험이 지닌 무궁무진함을 느끼게 해준다.

황인기씨는 전통과 자연을 '지금, 이 곳의 언어'로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가, 발랄하게 풀어나간다. 조선 후기의 진경시대를 열었던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는 컴퓨터 작업을 거쳐 노랑과 검정 레고로 비슷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이 먹과 붓으로 놀았듯, 현대인은 레고로 논다.

소꿉놀이나 땅따먹기처럼 좋았던 추억들을 한뜸 한뜸 바느질한 신경희씨의 조각보, 지워진 기억들을 하나 하나 이어맞춘 듯한 유현미씨의 퍼즐, 물감 장난하듯 손가락으로 색깔을 점점이 찍어 만든 유병훈씨의 '숲-바람' 연작.

식생활에서 친숙한 콩을 불리고 갈아 그 은은한 콩즙의 색감을 풀어놓은 정종미씨의 '몽유도원도' 등은 열린 눈이 받아들이는 만큼 즐거운 경험으로 남는다.

전시를 준비한 신정아 큐레이터는 "주제를 던져버리고 각기 다른 작품을, 제작되는 과정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어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현대미술을 좀 더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마련했다"고 말했다.

미술관 쪽은 또 20일 오후 2시 정종미씨를 시작으로 토·일요일에 작가별로 대화 및 작품 제작 과정 시연회를 열어 보다 '열린 미술'의 토론장이 되도록 꾸렸다. 입장료 어른 2천원, 학생 1천원(단체 20명 이상 20% 할인). 02-737-765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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