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혁명 기념행진 앞장선 美육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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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14일에는 해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전통적인 군사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육·해·공 군인들과 경찰·소방대는 물론이고 외인부대 용병까지 개선문에서 콩코드 광장까지 행진하며 위용을 뽐낸다. 이 대열의 선두에 나폴레옹이 설립한 국립이공대학(에콜 폴리테크닉) 학생들이 서는 것은 오랜 관례다.

하지만 올해 행사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2백명의 미국 육군사관학교 생도가 선두에 나섰다.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생시르)와 함께 1802년 설립된 미 육사(웨스트포인트)의 개교 2백주년을 기념한다는 취지라지만 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존경과 멸시·애증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서로를 조롱하는 것은 양국 정치권의 오랜 전통이다. "미국 때리기는 프랑스 정계의 전통 스포츠"란 말은 이미 한물 간 유머다.프랑스에 대한 냉소적 조크 또한 워싱턴 정가의 일상사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뉴욕에 가보는 게 소원인 프랑스인들도 미국의 일방주의에 맞서 반미 구호를 외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프랑스산 포도주를 곁들여야 품격있는 저녁식사라고 믿는 미국인 역시 프랑스 대사관 앞에 포도주병을 던지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전문가들은 양국의 이율배반적 정서의 밑바탕에는 정치철학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펠릭스 로하틴 전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는 "양국엔 자신의 시스템이 더욱 민주적이라는 철학적 논쟁이 엄존한다"고 분석했다. 프랑스 외무부의 고위 관리도 "사회적 가치 차원에서 양국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고백한다.

전통을 깨고 미 육사 생도를 초청한 것은 이처럼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하려는 프랑스 정부의 노력일 게다. 파리 시민 역시 장래의 미군 지휘관들을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것은 나치 치하에서 파리를 해방시켜준 미군을 뜨겁게 맞던 때의 감정과 또 다른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인들이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프랑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잦은 마찰을 빚었던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동상이 이날따라 쓸쓸하게 보였다. 하지만 어쩌랴. 시대와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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