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美의원들 '스페인語 과외'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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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하루 일과가 시작됐다고 보기엔 조금 이른 시간인 지난달 19일 오전 8시쯤. 영어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낯선 외국어 발음이 워싱턴 미 의사당 지하회의실 주변의 복도를 타고 흐른다.

"쿠안토 티엠포 아세 케 비베 앤 에스타도스 우니도스."(미국에 온지 얼마나 됐나요.)

"네세시타 알고."(뭐 필요한 것 없어요.)

8호 회의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민주당 하원 의원 6명이 강사의 지도 아래 스페인어를 소리높여 따라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동료의원들과 스페인어 스터디클럽을 만들었지만 다들 너무 바빠 일주일에 한두번씩 밖에 못 모여 아직은 초보다. 그래도 웬만한 인사말이나 비서가 써주는 스페인어로 연설원고를 읽을 수준은 된다."

클럽을 주도하는 텍사스29구역(휴스턴)의 진 그린 의원에게 "취재에 응해줘 고맙다"고 하자 곧바로 "데나다(천만에요)"란 대답이 나온다. 스터디 클럽의 고정멤버는 그린 의원과 같은 텍사스 출신 마틴 프로스트·니컬러스 램슨 의원, 그리고 일리노이의 잰 샤코브스키, 캘리포니아의 조지 밀러, 미네소타의 베티 매컬럼 의원이다. 이들이 바쁜 틈을 쪼개 공부하는 이유는 날로 늘어나는 히스패닉계(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계) 유권자 때문이다.

지역구 유권자 60%가 히스패닉계인 프로스트 의원은 "지난번 대통령 선거를 보지 못했느냐. 이제 서·남부 지역 의원들이 정치생명을 유지하려면 스페인어는 반드시 해야 한다. 유창하게는 못해도 스페인어를 하려고 노력한다는 자세는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지난 대선 캠페인 때 조지 W 부시 후보는 조카(동생 젭 부시 플로리다 지사와 멕시코계 부인의 아들)를 자주 데리고 다녔고, 스페인어 연설이나 농담도 빈번히 했다. 일부에선 "같은 공화당 후보라 해도 밥 도울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히스패닉계로부터 25%의 표밖에 못 얻었지만 부시는 이런 노력 덕에 35%나 얻었고, 이것이 승리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뉴트 깅그리치 하원의장은 최근 "오는 11월의 중간선거를 시작으로 향후 20년 동안 미국정치는 히스패닉계의 표심(票心)에 달려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때문에 공화당은 올해 초 지구당 간부들에게 열흘짜리 스페인어 집중 어학 코스를 제공하고 수시로 히스패닉계의 문화·정서·복지 등과 관련한 정책 토론회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한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보수정치인 팻 뷰캐넌은 "히스패닉은 자신들의 언어·문화·종교(가톨릭)를 고집하며 미국이라는 용광로에 용해되기를 거부하고 있다. 계속되는 불법이민과 다산(多産)을 통해 과거 멕시코 영토였던 미국의 서남부지역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그린 의원은 "과거 독일이나 이탈리아 이민자도 1·2세대는 영어를 잘 못했다. 히스패닉이라고 해서 무조건 같은 출신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나는 과거 후보지명전에서 수차례 히스패닉계 경쟁자를 만났지만 우리 주민들은 나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선거 때문에 스페인말을 배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역주민들에게 가까이 가려는 정치인의 당연한 노력이 아니냐"고 말했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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