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이 서로를 보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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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의지가 강한 선들이다. 선보다 구도라는 말이 더 적확하겠다.'배병우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들은 수많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포위된다. 사진작가 배병우(52)씨는 풍경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으로 결정했다.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중심을 얻으려는 집중이 세(勢)의 형국으로 나타나 선은 치솟거나 가라앉거나 오르거나 내려앉으며 그 기백이 웅장하게 화면을 지배한다. 여백도 만만치 않다. 허와 실, 빔과 성김이 얼핏 한 폭 산수화 또는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작가는 흑백사진으로 동양화를 했다. 산과 바다와 하늘과 바위는 화선지에 스며드는 먹처럼 서로에게 몸을 비비며 호응한다. 이 사진들에서 대상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강력한 표현을 가져오는 무기는 빛이다. 수만 가지 색을 지닌 먹처럼, 빛은 인화지 위에서 산산이 퍼진다. 흑과 백은 이완과 긴장을 누리며 서로를 보듬고 버팅긴다. 배씨는 "산과 바위는 양(陽)과 남자를, 물과 구름은 음(陰)과 여자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한국적인 미감을 찾아온 작가는 선(빛)을 경계로 한 음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사진들은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여수와,'산' 연작을 위해 자주 찾은 제주도의 풍광이 주를 이룬다. 하늘과 땅을 뒤틀린 선으로 이어주던 '소나무' 연작이 그러했듯, 가파른 기세를 드러내며 불끈 선 암벽들조차 자연에 순응하며 하늘을 우러른다.

사진은 고요하고 담담하다. 자연의 침묵과 긴장은 그 앞에 선 사람을 관조하게 만든다. 서늘하고 적막하다. 배병우씨는 이제 구체적인 풍경 바깥으로 보는 이를 데리고 간다. 산과 바다를 검은 빛으로 지우면서 그는 '말 밖의 말'을 전한다. 말이 사라진 곳에 덤덤한 마음 한 조각이 남았다. 6일부터 8월 18일까지. 02-733-8940.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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