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프로들 저질 농담에 오보 소동까지 월드컵'말장난'지나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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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월드컵과 관련해 일부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들의 말 실수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독일 선수의 약물복용으로 한국이 결승에 진출했다"(SBS라디오)는 확인되지 않은 발언으로 전국을 발칵 뒤집어놓는가 하면 국가 대표팀 선수와 가족을 상대로 경솔한 말장난을 남발해 시청자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지난 25일 KBS-2TV 월드컵 특집 '서세원 쇼'에서는 서씨가 김남일 선수의 아버지에게 "아버님도 같이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라는 등의 농담을 던져 홈페이지가 다운될 정도로 항의가 빗발쳤다. 또 지난 23일 KBS-2FM '강성연의 가요광장'에서도 일부 게스트가 "솔직히 한국이 실력으로 4강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다"는 등의 발언으로 청취자들의 포화를 받았다.

일부에선 "전체 흐름과 말의 진의를 고려하지 않은 채 몇 마디만 떼어내 문제삼는 건 곤란하다"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해프닝은 그동안 줄곧 비판받아온 연예·오락 프로그램의 저질화 경향이 월드컵을 맞아 폭발한 것으로 '예고된 사고'라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연예·오락 프로는 잡담 경연장=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은 지난 4월 8일부터 3주간 TV 방송 3사의 14개 연예·오락 프로그램을 모니터한 보고서에서 사석에서나 어울릴 법한 발언이나 반말이 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문제가 있는 발언 중 상대를 비하하는 것이 전체의 약 30%를 차지했고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사담(私談)도 18%에 달했다.

경실련 미디어워치 김태현 부장은 "진행자들의 튀는 입담과 애드리브에만 의존하다 보니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며 "전문적인 인력을 섭외하고 방송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YMCA 시청자 시민운동본부의 안수경 간사는 "진행자에게만 의지해 방송을 제작하는 방송사들의 제작 행태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진행자의 80%가 개그맨·가수=연예·오락 프로의 진행자 중 64%가 개그맨이고 15%가 가수인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방송 언어에 대한 훈련을 쌓은 아나운서나 방송인은 15%에도 미치지 않아 비표준어·속어·비어가 남발되고 정제되지 않은 발언들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문화개혁 시민연대의 이동연 사무차장은 "순발력이 뛰어나고 유머감각이 좋은 개그맨이 진행자로 나설 수는 있으나 시청률을 의식해 점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를 남발하는 경향으로 흐르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또 "가수들의 절반 가량이 이들 프로에 출연해 주업인 노래가 아니라 개인기를 선보여야 하는 실정"이라며 "방송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연해 억지 묘기를 보이다 올들어 10건 이상의 부상 사고가 있었다"고 우려했다.

◇팬들이 나서야 한다= 대중음악 개혁을 위한 연대모임·시청자 연대회의 등 시민단체들은 연예·오락 프로의 고질적인 병폐가 시정되지 않음에 따라 방송국 앞 시위 등 본격적인 행동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특히 god를 비롯해 이승환·조용필·서태지 등 가수의 팬클럽과 연계해 연예·오락 프로 개선 운동을 펼칠 생각이다. 팬클럽들은 가수를 연예·오락 프로에 무분별하게 출연시키는 데 반발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단체들은 또 월드컵이 끝나는 대로 서울을 시작으로 '연예·오락프로 개혁을 위한 10만명 서명 운동'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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