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감동 묻고 제자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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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출근시간에 늦지 않고 축구 얘기도 가급적 삼가기로 오늘 아침 동료들과 약속했다."

한국팀이 독일과 월드컵 준결승전을 치른 다음날인 26일 '평소의 업무리듬을 회복하기 위해' 야근을 자청했다는 은행원 김경(39)씨의 말이다.

길거리 응원에 두번 참석했던 그는 "이제 월드컵의 감동은 가슴에 간직하자"고 했다.

태극전사들의 연승행진으로 한달간 들떠 있던 사회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직장도, 학교도 밀린 일과 일정들 추스르기에 나섰고 월드컵 기간 중 업종에 따라 희비가 엇갈렸던 영업 업소들도 서서히 정상을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한편에선 열광과 자긍과 허탈이 뒤섞인 소위 '월드컵 증후군'도 적잖이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발현된 시민의식과 열정을 일상의 에너지로 전환해 한단계 뛰어오를 때"라고 입을 모은다.

◇'이젠 일상으로'=26일 아침 출근한 생명보험사 설계사인 김영찬(37)씨는 올 여름 휴가를 가지 않기로 했다. 金씨는 "우리팀 응원 재미에 한달을 꿈처럼 보낸 지금 내 영업실적표를 보니 한 건도 없어 한숨만 나더라"며 "밀린 일도 꼼꼼히 정리하고 열심히 뛴 선수들처럼 내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독한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상당수 기업들은 그동안 잦은 단체응원·조퇴 등으로 생겨난 느슨한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회의·회람 등을 통해 '정상업무 복귀'를 독려하고 있다.

학사일정을 늦췄던 대부분 학교들도 수업 분위기를 챙기느라 부산하다. 서울 경신고는 다음달 1일 예정됐던 기말고사를 5일로, 수원 수성고는 28일의 기말고사를 다음달 3일로 늦췄다.

한양대 영상디자인학과 등 일부 대학은 방학임에도 월드컵 때 불가피하게 이뤄졌던 휴강 공백을 메우려고 7월 말까지 수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월드컵 증후군도 속출=회사원 박민혁(32)씨는 "'대~한민국' 환청이 들리고 선수들 모습이 어른거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며 "허전하고 의욕도 나지 않아 종일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담배만 피워댔다"고 말했다.

평소 축구에 관심이 없었던 주부 김현지(32·서울 노원구 중계동)씨는 "월드컵을 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허전한 가슴이 영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리 응원의 재미에 빠진 중·고생들은 기말시험을 앞뒀지만 집중하기가 힘들다고 호소한다.

새벽까지 월드컵 경기 재방송·하이라이트·특집방송으로 이어지는 TV시청으로 신체리듬이 깨지면서 불면증을 호소하는 환자들도 늘었다.

◇전문가 조언=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집단적 열광 뒤에 나타나는 일종의 정신공황 상태'라고 해석했다.

에너지를 집중해 몰두한 월드컵 경기가 우리 팀이 3,4위전으로 밀려나자 체내의 흥분물질 분비가 멈춰 정신·육체적으로 무력증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상일 박사는 "월드컵 후유증은 일종의 금단 증상으로 입이 마르고 일손이 안잡혀 심하면 손떨림 현상도 나타나며 최소 2주에서 6주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며 "충분히 자고 땀이 나게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했다.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 교수는 "지난 한달간 쏟아부은 에너지를 일상 속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공허감이 예상 외로 커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성호준·정용환·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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