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 넘칠수록 미디어 시선 냉철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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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Wir sind das Volk"(우리는 국민이다). 1989년 10월 동독 시민들이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면서 외친 구호다. 다시 2002년 6월. '대~한민국''오~필승 코리아'라는 구호는 한국 축구를 8강까지 끌어올린 원동력이 됐다.

두 사건의 성격은 판이하지만, 필자가 여태까지 경험한 것 중 가장 스펙터클한 사건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이같은 역사적인 사건에 흥분하고 감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흥분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언론인은 관전자가 아니라 사건과 사태의 평가자이며 해설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역사적인 스펙터클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효과에 대해 저널리스트들의 심층적인 진단과 설명을 듣고 싶어한다.

이번 월드컵 보도와 관련해 한국 저널리즘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언론이 일반 시민들보다 더 흥분하고, 더 선동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신문이 자신들이 선정적이라고 비판해 온 스포츠지와 연예지 수준의 제목 뽑기와 기사쓰기를 하고 있다.

또한 지상파 TV방송들은 예고된 프로그램 편성을 자의적으로 바꾸는가 하면, 월드컵 경기 중계에만 몰두해 시청자들이 다른 프로를 선택할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 특히 축구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라 승리에 대한 집착과 필승 이야기로만 도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월드컵은 4년 만에 한번씩 열리는 지구상의 가장 큰 축제로,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세계적인 축제를 치러본 적도 없고 즐겨본 적도 없다. 그러니 흥분할 만도 하다. 한국팀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원래 축제란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의 문화다. 오랜만에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화려하게 화장도 하고, 일면식도 없던 타인들과 어울려 키스도 하면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마음껏 발산하는 것이 축제다. 사회의 제반 여건이 안정된 유럽에서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고무하는 축제들이 많다. 결국 축제란 삶을 풍요롭게 하고 다원주의를 실현하는 방식 중의 하나일 뿐 그 이상의 무엇은 아니다.

축제 속에서 저널리즘은 획일화가 아닌 다원주의적 방식과 가치를 보여주고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축구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원적인 삶과 문화·예술 등 다양한 사안과 내용에 관심있는 독자들을 배려하는 지면제작과 방송편성이 저널리즘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한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가 학습한 가장 소중한 가치는 바로 공동체 정신과 지도자의 리더십이다.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학연·혈연·지연 등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과 역량에 따라 선발하고 운영하는 보편성, 이 두 가지 가치를 배웠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보편적인 가치가 역동할 수 있도록 공론화해 가는 것이 월드컵 이후 한국 저널리즘이 취할 올바른 자세라고 본다. 축제 이후 시민들이 갖게 될 허탈감을 아우르고, 쇠약해진 기력을 다시 일상에 집중하도록 고무하는 길잡이 역할도 해야 한다.

독일 통일 당시 흥분에 휩싸인 나머지 무엇이 문제이며, 통독 후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 것인지를 냉철하게 짚어주지 못한 독일 언론이 아직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언론인들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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