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가고 '전투'만 남은 월드컵 그라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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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독학한 스페인어 실력이지만, 나는 가끔은 그게 우쭐해질 때가 있다. 메조소프라노 테레사 베르간사가 부르는 스페인 민요를 들을 때, 그리고 '펜대로 드리블하는' 느낌을 주는 우루과이의 작가 갈레아노의 에세이를 읽을 때다. 이미 번역돼 있는 『수탈된 대지』(범우사), 『사랑과 전쟁의 낮과 밤』(한길사)에서 보여준 대로 그는 제3세계 민중의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현실을 비판한다. 아메리카 역사를 다룬 『불의 기억』 3부작은 미국에서 랜넌 상을 받을 만큼 호평을 받았다.

이 시대의 역사저술가이자 에세이스트인 그의 에세이 솜씨는 움베르토 에코보다 앞선다. 단문에 패러디·풍자·반어법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재주라니! 그런 그가 축구에 대해 1백52개의 에세이를 썼다. 그걸 담아낸 멋진 신간 『축구, 그 빛과 그림자』는 영웅열전과 백과사전을 겸비한 종합선물 세트의 읽을거리다.

저자는 1백년 축구사를 통해 세계사의 이면까지를 엿본다. 사회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의 게으름도 질타한다.

"나는 축구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신이 어떻게 축구를 하는지 내게 말해주면,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 축구를 둘러싼 전제정치에 대해 눈을 감고 있는 정치학자들에게도 공화제·민주제의 미덕이 확산돼야 한다고 한 수 가르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축구 에로이카'라 평가하고 싶다. 자유·평등·박애·아름다움·다양성이 넘쳐흐르는 축구 공화제로 이르는 베토벤의 영웅교향곡 말이다.

제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는 영웅열전. 영웅은 당연히 펠레·마라도나·에우세비오·크루이프 등이고, 1백년 동안 명멸했던 영웅들에게 저자는 송가를 바친다. 제2악장, 장송행진곡은 아다지오 아사이에 해당한다. 골고다 언덕으로 이르는 현실들이 전개된다. "축구의 역사는 즐거움에서 의무로 변해가는 서글픈 여행의 역사다. 축구의 산업화와 더불어 경기를 하며 느끼는 단순함의 미학이 사라져버렸다." 즉 저자는 호모 루덴스가 수동적인 텔레비전 시청자로 둔갑한 현실을 개탄한다. 슬픔은 이어진다.

축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국제축구연맹(FIFA)이라는 관료기구가 탄생한다.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는 피파크래시(Fifacracy)는 텔레비전이 등장하면서 가속화된 축구의 산업화를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아벨란제-블라터로 이어지는 관료기구는 광고주·구단주·언론사주를 연결하는 철의 동맹을 결성하고, '돈되는 축구'를 지향한다. 축구산업 매상고는 1994년 2천2백50억달러, 93년 GM 매출액의 두배 가량으로 팽창한다. 그 결과 아름다운 축구는 파괴되고, 그라운드의 예술가들은 발 노동자로 바뀐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20세기 축구사가 대담성에서 두려움으로의 여행이라는 사실은, 2-3-5에서 4-3-3, 4-4-2를 거쳐 5-4-1에 이르는 전술의 변화다. 그 결과 지난 50년간 골인 평균치 숫자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점점 빨라지고, 점점 멋을 잃어가는 프로축구는 패배에 대한 공포로 인해 주력과 힘의 경연장으로 변했다." 당연히 발노동자의 노동강도 역시 높아졌다. 지난 20년간 프로축구 선수 수명이 평균 12년에서 6년으로 감소한 것도 그 때문이다.

축구 스타일의 다양성도 사라지고 있다. 경이로운 브라질의 삼바축구마저 해체 중이다. "허리가 휙휙 휘어지고, 몸이 파도치듯 웨이브 지는 세계에서 가장 멋진 축구"에 스콜라리 감독이 사망선고를 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갈레아노는 이 모든 것이 '아름다움에 반대하는 자들의 동맹'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독설을 날린다. 제3악장, 스케르초 풍의 기소장에서는 알레그로 비바체로 이런 죄목들이 나열된다. "아벨란제와 블라터는 금권정치의 주범" "축구선수들은 국제노동기구(ILO) 규정의 적용을 거부한 부당대우" "스콜라리 감독은 브라질의 영혼을 판 죄인".

또 있다. "마라도나도 투자대상일 뿐"이라고 내뱉는 구단주의 경우는 인신모독죄를 내건다. 더불어 그는 이를테면 마라도나가 세계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약물중독 때문이 아니란다. 무엄하게도 이렇게 외친 죄목이다. "축구에는 왜 ILO의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가? 왜 축구선수들은 축구로 다국적 부(富)를 쌓은 다른 거물들의 비밀계좌를 알 수 없는 것인가?" 아벨란제는 침묵을 했다.

이 책의 이어지는 피날레 제4악장은 알레그로 몰토. 저자는 축구 영웅들을 회상하며, 트로피칼 축구가, 민주공화제의 축구가 부활하길 꿈꾼다. "망해가는 문명의 가장 일관된 특성은 표준화와 획일화 경향"이라 갈파한 아놀드 토인비를 추종하는 갈레아노는 아름다운 축구, 다양한 축구를 위해 외친다. "지루함에 지친 만국의 친미주의자들이여, 궐기하라."

이성형

<세종연구소 초빙연구위원·중남미 지역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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