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國恥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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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은 프랑스를 버렸다."

세계 최고의 팀을 가졌다고 과시하던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은 절망과 한탄으로 무너져내렸다. 희망의 마지막 불꽃이 꺼져가듯 타올랐지만 16강 탈락을 알리는 심판의 휘슬 소리가 울리면서 파리는 순식간에 탄식의 바다로 변했다.

○…시민들은 경기 결과에 말을 잃었다. 활기차던 파리 시내는 적막에 묻혀버렸다. 파리 남부의 르 카드랭 바에서 경기를 지켜본 한 남성은 "1998년 월드컵 및 2000년 유럽리그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푸른색 유니폼도 마력을 잃은 모양"이라고 한탄했다. 또 다른 이는 "그들은 늙었다. 돈도 너무 많이 벌었다. 이젠 지쳐버리고 만 것"이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AFP통신은 파리 중심가의 한 상점에서 월드컵 관련 상품을 팔던 점원들의 얼굴은 그들이 입고 있던 파란색 모조 유니폼보다 더 파랗게 질렸다고 전했다. 한 여점원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고개를 떨궜다고 통신은 전했다.

○…파리시청 앞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 앞에 모인 5백여명은 경기가 끝나면서 깊은 한숨과 함께 자리를 떴다. 일부에서는 프랑스의 추락이 믿어지지 않는 듯 "재앙""천재지변"이라는 외침이 터졌으나 많은 사람은 체념의 표정으로 말을 잊은 듯했다.

시내 카페 대부분은 온갖 핑계를 대고 빠져나온 직장인들로 붐볐으나 덴마크의 골이 먼저 터지자 "이제는 끝났다"는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지단의 출전에 잔뜩 기대에 부풀었다던 회사원 토마 봉부와장(34)은 마르셀 드사이의 헤딩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퉁겨나오자 "신이 프랑스를 버렸다"고 울부짖었다.

후반전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은 승리보다는 '첫골'을 염원했지만 지단의 몸을 날리는 투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골이 터지지 않자 안타까움에 몸을 떨었다. 트레제게의 강슛이 다시 골대를 맞고 나오자 부동산업자 미셸 드니피에(51)은 "세네갈의 저주가 너무 강했던 모양"이라며 혀를 찼다. 한 시민은 "선수들이 돌아오면 토마토를 던지며 맞아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은 프랑스 탈락이 결정되는 순간 선수나 감독을 비난하지 않는 성숙함을 보였으나 일부에서는 세차례 경기에서 단 한골도 못넣은 프랑스의 무기력을 욕했다.

아마추어 축구선수라는 장피에르 고탕다르(28)는 "선수들이 축구보다 광고 같은 돈벌이에만 전념하니 이꼴이 나온 것"이라며 "프랑스 축구는 예술 축구가 아니라 드라마 축구"라고 맹비난했다. 한 시민은 흥분 끝에 "흑인과 아랍인들로만 구성된 축구팀이 어떻게 프랑스팀이 될 수 있느냐"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하다 주위에서 관전하던 흑인들과 한때 험악한 꼴을 연출하기도 했다.

파리시청 앞에서 경비 근무를 서던 경찰관은 "경기가 오전에 끝나서 천만 다행"이라며 "만약 밤에 끝났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쓰게 웃었다.

○…개막전 이후 지옥을 수차례 오르내린 프랑스 대표팀의 로저 르메르 감독은 "우리는 예선경기 내내 모든 실린더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며 자성(自省)했다. 그는 또 "예선 탈락이라는 결과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겠다"며 냉담한 현실을 받아들였다.

르메르 감독은 "오늘 경기에서 선수들은 모든 잠재력을 발휘하려 했다"며 "누구도 비난받아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르메르 감독은 "우리가 없어도 이번 월드컵 대회는 멋진 경기가 될 것이다. 한국도 16강에 진출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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