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보유 특허 100건중 92건 돈 안되는 '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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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기업 연구원인 K박사(39). 그는 1993년 입사한 뒤 지금까지 모두 23건의 특허를 따냈다. 그러나 그 중 사업화에 직접 이용되거나, 사용권을 다른 기업에 판 것은 하나도 없다.

K박사는 "일단 가능하면 특허를 내고보라는 회사의 적극적인 정책에 따라 특허를 냈을 뿐, 내 자신도 '이런 것을 굳이 특허까지 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국내 대기업들이 보유한 특허 1백건 중 92건은 전혀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같은 사실은 본지가 9일 입수한 특허청의 '특허사업화 실태조사'에서 밝혀졌다. 특허청은 현대리서치연구소에 의뢰해 41개 대기업의 특허 1만7천여건을 대상으로 사업화 성공 여부를 조사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대기업의 특허 중 기술개발비용 이상의 수익을 올린 것(사업 성공)은 7.2%에 불과했다. 또 다른 기업에 대가를 받고 특허권을 넘긴 경우는 0.08%뿐이었다. 수익을 가져다주는 특허가 1백개 중 8개도 채 못되는 셈이다.

또한 수익 여부를 떠나 사업화에 이용된 특허는 21.9%뿐으로, 10건 중 8건 꼴이 아예 사업화에 쓰이지조차 않았다.

우리 대기업들이 기술상품으로서 가치있는 특허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한 현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허청 정양섭 국장은 "일본의 기업은 수익을 올리는 특허가 우리의 3배인 30%선"이라고 말했다.

'부실 특허'가 양산되는 것은 기업들이 특허출원 여부를 인사고과 평가에 적용하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내놓고보자'식의 출원이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허의 질보다는 양에 집착하는 기업들의 경쟁심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풍토는 기업에 부담으로까지 작용하고 있다. 최근 5년간 국내·해외에 2만5천여건의 특허를 등록한 대기업 A사 관계자는 "특허 출원·유지 등 관리비용으로 최근 3년간 4백억원 이상을 지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허권 이전이 평균 0.08%에 불과해 기술료 수입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미국 IBM은 2000년 기술료 수입이 17억달러(약 2조원)로,국내 2000년 총기술수출액(2억달러)의 8.5배에 해당한다.이는 특허 1건당 약 1억3천만원의 기술료를 벌어들인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학상 수석연구원은 "앞으로 미국 퀄컴의 CDMA기술이나 국내 기업이 개발한 MPEG기술처럼 국제표준으로 채택돼 향후 커다란 수익을 올려줄 분야에 연구개발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홍승일·권혁주 기자, 이은주 조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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