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에서 길어올린 '나의 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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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사랑의 번민에 싸여 있던 젊은이가 철학가가 되어 돌아왔다.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린 소설 『로맨스』 의 작가로 출발한 드 보통의 작품 연보를 보면 그렇다.

1969년생인 드 보통이 9년 전 낸 『로맨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차 있었다. 일반적인 소설 문법은 염두에 두지 않고 서술 도중에 연모하는 여인과 같은 비행기에 타 옆자리에 앉을 확률을 계산해낸다든지 하는 엉뚱한 상상력을 개입시켜 영상 세대의 관심을 끌었다. '사랑에 대한 철학적 모험'이란 부제를 달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소설을 빛내기 위한 장치로 보였다.

그런데 드 보통은 97년 문학비평서 『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꿨나』를 내면서부터 달라졌다. 사랑에 주로 몰두하던 그는 인간의 존재같은 좀더 심오한 주제로 생각을 넓혔다. 2000년작 『드 보통의 삶의 철학산책』(원제 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부터는 본격적으로 철학을 논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양 철학자 가운데 소크라테스·에피쿠로스·세네카·몽테뉴·쇼펜하우어·니체를 꼽았다. 선택 기준은 간단하다. 드 보통이 안고 있는 인생 고민에 해결점을 던져 주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수많은 명저와 명언을 남긴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도 현대인 드 보통에게 쓸모없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제외시켰다.

따라서 이 책은 소설가가 풀어 쓴 서양철학사가 아니다. 철학 사상을 현재에 적용시키는 방법을 시연해 보이며 고전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첫 타자로 소개하는 소크라테스의 경우, 드 보통에게 충격을 준 것은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란 그림이다. 독배에 한 손을 올려 놓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림 속 소크라테스는 마지막 철학 강연을 끝내는 데만 관심 있다. 드 보통은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인기 없음에 저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고백한다. 타인과 대화할 때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보다 상대방의 호감을 사는 일이었다고.

그러나 작가는 소크라테스 생애와 사상을 배우며 생각이 바뀐다. 그는 "우리를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면서 내세운 이유들이 얼마나 훌륭한가라는 점"을 깨닫는다.

또 감각적 쾌락을 중시했던 에피쿠로스에게서는 행복의 요건을 배운다. 전용 제트기와 주말용 별장, 이탈리아 명품 의류만으로는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다. 결핍에서 오는 고통만 없다면 검소한 음식도 호화로운 식탁 못잖은 쾌락을 제공할 수 있으며 물질보다는 우정·자유·사색을 행복의 요건으로 꼽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드 보통은 인기·돈 같은 문제뿐 아니라 좌절·지식·사랑에 대한 고민도 풀어 놓는다. 밧줄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것보다 숙명에 굴복하며 참는 것이 낫다는 세네카, 이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이미지를 깨뜨리며 지식의 절대성에 의문을 던졌던 몽테뉴, 지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에게서 해답을 찾아 본다.

제자인 폭군 네로에게 죽는 세네카,1천권의 장서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도 농부들과 어울려 평범한 삶도 누릴 줄 알았던 몽테뉴, 우울한 아버지에 비해 지나치게 사교적인 어머니를 둔 쇼펜하우어의 일대기도 곁들여 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고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홍수현 기자

이 책은 영국 방송국 채널4가 TV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으며 영국에서만 15만부가 팔려 철학서로서는 보기드문 베스트셀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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