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정치와 희망의 축구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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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 정치는 작아보였다. 폴란드팀 골 네트가 출렁거리면서 온 국민이 얼싸안고 하나가 되는 순간 정치는 쪼그라들었다.

'깽판' '미친×당' 등 뒷골목의 막말을 앞세워 국민을 '내편, 네편'으로 편가르기 했던 갈등과 반목의 정치는 국민 화합과 감동의 축구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국회 원(院) 구성조차 못한 탓에 월드컵 개막식에 국회의장도 내보내지 못한 정치권은 혼연일체의 함성 속에 형편없이 초라해진 것이다. 해운대와 부산역 광장에서 '붉은 악마'가 됐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구태 정치와 희망의 축구 사이의 극단적 차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감동의 드라마에는 히딩크 감독식의 비전·준비·원칙이 있었다. 그것을 화려한 플레이로 소화해낸 태극 전사들의 열정과 자기 관리도 있었다. 히딩크가 내놓은 기초 체력과 팀워크 중시, 중장기 플랜, 연고주의 선수 기용 타파, 공정 경쟁은 한국 축구의 고질적 병폐를 떨쳐냈다. 반칙과 탈법, '형님, 아우'식의 패거리식 결속과 인사 우대, 속임수와 떼쓰기가 판치는 정치 구태에 그같은 경영과 리더십·훈련은 신선한 교훈이다. 6·13 지방선거 현장에서 흑색 선전과 흠집 내기의 네거티브 전략에 골몰하는 후보와 정당 지도자일수록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폴란드전 승리 후 정치권의 비방 중단 다짐은 그같은 자극의 반영일 것이다.

새 정치의 경쟁력과 변신은 한국 축구의 쾌거 속에 해답이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그 속에서 지역·계층·세대 간 분열과 대립을 씻고 대통합과 도약의 정치를 이뤄내 달라는 국민의 염원을 새겨야 할 것이다. 앞으로 6개월간 계속될 대선 정국은 업그레이드된 공정 게임이 돼야 한다는 게 국민적 요구다. 이제 국민은 페어 플레이 정신의 숙지, 짜임새 있는 정책 마련과 대안 제시, 줄 세우기 거부의 풍토가 정치권에 자리잡는지를 지켜볼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며 일주일 남은 지방 선거가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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