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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갈이' 바빴던 2004년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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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벌써 2004년을 회고해야 할 때다. 2004년은 전 세계적으로 개혁과 변화의 물결이 넘쳐났다. 옛 소련권에서는 그루지야의 '로즈혁명'에서 시작해 우크라이나에서는 '오렌지 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옛 소련권 공화국에서 목격되는 이와 같은 민중의 힘과 세력 대체의 움직임은 분명 '새판을 짜는 모습'이 이 지역의 주도적인 현상임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런 개판(改版) 같은 충격파는 사실 전 지구적으로 보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더 먼저였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쟁은 테러전쟁이라는 의미 외에 새로운 형태의 '문명적 개판'의 의미도 있었다.

서구문명의 가치와 인권을 앞세운 이러한 '개판적 압력'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국의 엄중한 경호 아래 역사상 최초로 지도자를 서구식 보통.비밀.직접선거로 뽑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라크에서는 이러한 개판이 역시 미국 주도로 진행 중이다.

이와 같은 개판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나라와 문화, 외부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요즘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듯한 변화를 통해 어느덧 혁명적 변혁을 이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또 다른 주목거리다.

냉전 종식 후 유럽은 통합과 새 회원국 확대로 미국과 세계에 도전하고 있다. 달러 약세와 유로의 강세, 미국 일방주의에 의한 미국의 소프트 파워 감소와 유럽적 가치의 재부상은 물리력만이 지배국가.지배문명의 조건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2004년 유럽에선 만년 축구 변방이던 그리스가 '유로 2004'에서 우승했고 소위 돈 많은 북부지역 유럽국가들에 밀려 왔던 남유럽 지역 국가들의 반란과 약진이 나타났다. 확장된 새 유럽연합의 집행위원장 자리가 남유럽 출신인 마누엘 바로수 포루투갈 총리에게 돌아간 데 이어 초대 외무장관 자리도 역시 스페인의 하비에르 솔라나에게 돌아갔다. 여기다 신유럽헌법 서명식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렸다. 이와 같은 남유럽의 행보는 '역사에서 파워의 독점은 영속적이지 않다'는 철칙과 이들 중소 국가의 자발적 대응능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새로운 판짜기'의 분위기는 동북아도 마찬가지다. 이 지역은 경제적 교류가 정치적 화해를 선도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지역협력 구조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중.일 3국의 복합적 교역이 만들어내고 있는 협력과 협업은 동북아 지역이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더 역동적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치.안보적으로는 이 지역은 여전히 냉전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일동맹을 강화해 군사적 역할을 확대하려는 일본과 지역대국화하는 중국의 대립, 북한 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북한의 대립 고조는 이제 이 지역에서 보이고 있는 복합적 경제교류가 정치에 의해 발목을 잡히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지난주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제품이 남한의 백화점에서 판매된 사건은 매우 상징적이다.

동북아 국가들이 동북아 냉전의 상징인 한반도에 새로운 형태의 평화구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동북아의 공동체적 협력과 평화의 미래는 더딘 발걸음을 갈 수밖에 없다. 동북아 국가들이 20세기적 구조와 현실의 감옥에 갇혀, 지역전략에서 상호협력의 틀을 만들지 못하고 군비경쟁이 아닌 평화만들기 경쟁에 나서지 못한다면 동북아의 새판 짜기는 과거 20세기 냉전 때보다 더 혹독한 질곡의 모습으로 우리를 옥죌 것이다. 그리고 동북아는 또다시 외생적 변수에 의해 발목을 잡힐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2004년 말 개성공단에서 제품이 나왔다는 상징성에 2005년의 희망을 걸고, 내년에는 동북아의 협력 기운이 더욱 싹터 북한의 개방과 국제사회에의 동참 분위기가 이룩되길 기대한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