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는 타율적" 해석은 잘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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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요즘 한국사 연구자들은 자존심이 상해 있다. 국내 자료나 중국·일본의 자료를 중심으로 공부하던 이들이 최근에는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충고를 계속 듣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정치·경제·군사는 물론 역사 인식에서도 미국의 패권이 강화돼 우리보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가 세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역사비평』가을호는 미국의 한국학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미국의 한국사 연구' 특집을 마련했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 동향과 그들의 교과서에 나타난 문제를 역사적으로 소개한 데 이어 에드워드 와그너(전 하버드대, 사망)·제임스 팔레(워싱턴대)·카터 에커트(하버드대) 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의 이론적 성과를 살펴보는 논문 다섯 편을 실었다.

우선 마이클 신(코넬대)교수가 미국의 한국사 연구를 학맥을 통해 정리했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사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국가적·경제적 필요'에 힘입은 것이라 규정하고,그 시각이 50년대의 압도적 패러다임이었던 근대화론에 기대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서구를 기준으로 삼아 자본주의 발전전략을 절대화한 근대화론은 한국 사회에 독자적 발전의 동력이 없다는 '정체성론'으로 이어지는 등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글에선 또한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존 던컨(UCLA) 등이 참여해 1970년대부터 형성한 비판적 한국사 연구의 흐름을 '진지한 아시아 연구자의 모임(Committee of Concerned Asian Scholars)'을 통해 소개한다.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도입된 역사학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한국사에 적용하려는 시도도 최정무(UC 어바인대)교수를 예로 들어 전하고, 장기 역사의 서술을 거부하는 '현재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은 '팔레 마피아'란 말이 생겼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제임스 팔레다. 김성우(경산대)교수는 그가 한국 역사학계의 거대 담론인 민족주의론과 내재적 발전론·사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과정에 주목한다.

특히 팔레가 '관료적 군주제' '양반 귀족제' '노예제 사회' 등의 개념을 원용해 조선 시대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한편 양반 제도가 조선 시대의 특징이라는 주장을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식민지 정체성론에 다가갔다고 분석한다.

현재 50대로 연구 활동이 가장 활발한 카터 에커트도 혹독하게 비판받았다. 정태헌(고려대)교수는 민족자본가의 존재와 자본주의 맹아론 등에 입각한 내재적 발전론을 그가 논박하는 방식이 허구적이며, 사실상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논리라고 주장한다.

또 에커트가 민족주의의 다양한 형태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민족주의는 상황 여건에 따라 파시즘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반제 투쟁과 국민주권주의로 표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 교수에 따르면 에커트는 '감정적 수준'의 인식에 머물러 있을 따름이다. 속류 경제성장론에 기초해 일제 식민지와 해방 이후의 경제 성장을 양적으로만 다루고 한자 문화권은 곧 사대주의적이라고 규정하며, 자율적·주체적 역사 전망을 배제하는 점 등이 그런 예라는 것이다.

미국이 우리와 나란히 한국사 연구의 1차적 생산자 노릇을 하고 있는 만큼 그들의 논리를 무시만 할 수는 없게 됐다. 최근엔 한국 학계의 민족주의 사학을 미국 학자들이 강하게 비판해 한국 측이 수세에 몰리기도 했다. 우리에게 어떤 편향이 있다면 그것을 수정하면서 한국 학계의 논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제 외국 학자들과의 공동 연구는 물론 치열한 논쟁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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