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끝> 축구 즐기기:팬클럽 통해 '12번째 선수'로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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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축구경기는 '보는 재미'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축구 관람의 이유를 보는 재미의 추구에 한정하는 것은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불과하다. 여가를 통해 얻고자 하는 즐거움은 몰입 수준에 따라 최소한 네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보기(seeing)·가지기(having)·하기(doing)·되기(being)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재미는 진화 과정의 발전 통로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보는 것을 통해 재미를 느낀다. 보는 즐거움은 가장 가벼운 수준의 몰입 상태에서 나온다. 보는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경기장을 찾지는 않는다. 매스미디어의 발달 덕분에 TV를 통해서도 보는 재미는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축구장을 찾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한 종목만 꼽으라는 질문에서 한국인은 축구(49%)를 야구(18%)보다 두 배 이상 선호하는 데 반해 일본인은 야구(36%)를 축구(7%)보다 다섯배 이상 더 좋아한다고 답해 대조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 프로축구 경기의 평균 관중수가 프로야구의 그것에 비해 훨씬 떨어지며, 일본 프로축구 평균 관중 수에 비해서도 적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많은 한국인에게 있어 축구는 단지 '보는 수준의 여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보는 재미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정상적인 경우 '가지기'를 통한 즐거움을 추구하게 된다. 축구 보기의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축구와 관련한 각종 소품을 갖고 싶어 한다. 축구공·축구화·유니폼 등을 구입한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당장 사 달라고 성화를 부린다. 어른들은 종종 '자기 팀'을 갖게 된다. 자기 팀을 가지면 다른 경기는 보지 않더라도 자기 팀이 하는 경기는 꼭 보게 된다. 프로축구는 보지 않는 한국인이, 국가대표팀의 경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현상은 바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가지는 즐거움이 지속되면 축구 소품이나 자기 팀에 대한 애착이 생긴다. 팀의 선수 개개인이나 감독의 스타일 및 팀 전술 등에도 관심이 늘어난다. 이런 관심이 지속되면 거의 전문가 수준에서 경기를 분석한다. 이 때가 되면 비로소 경기장을 찾는 빈도가 증가한다. 팬이 되는 것이다. 자기 팀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자기 팀을 가지는 재미는 팀이나 선수의 경기력 수준에서 영향을 받는다. 경기력이 떨어지면 가지기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리고, 경기 자체에 대한 흥미도 떨어진다. 한국 프로축구팀이 많은 팬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자기 팀이나 좋아하는 선수가 계속해 좋은 경기를 하면 관중은 응원자 혹은 서포터가 된다.

이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두가지 행동을 통해 '하기'의 즐거움을 체험한다. 하나는 취미로 축구를 직접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기장에서 응원하기를 통해 재미를 얻는 것이다. 축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각종 아마추어 경기에 축구 선수로 출전하기를 원한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의 경우 '하기'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응원하기를 통해 재미를 얻는다. '응원하기' 행동은 흥분과 탄식은 물론 폭력과 눈물도 동반한다. 심리적인 역동성을 느끼게 된다. 자기 팀이 이기면 자기가 이긴 것으로 느끼고, 팀이 지면 마치 자기가 진 것처럼 느낀다. 팬이 돼 이처럼 강렬한 체험을 겪게 되면, 이제 자기 팀과 관중은 하나가 되는데 이런 현상을 '동일시'라고 한다. 자기 팀이 실수로 자책골을 넣으면 심한 배신감과 모멸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하고 자책골을 넣은 선수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한다.

동일시의 결과는 긍정적인 형태로 나오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팀을 금전적·심리적으로 지원하는 행동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다. 어떤 사람은 외국에서 벌어지는 경기에까지 직접 가서 응원을 한다. 이 수준에서의 응원하기는 사랑의 즐거움과 흡사하다. 사랑할 때 나타나는 공통 현상처럼 상대에게 종속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개별 선수나 팀을 우상으로 상징화하고, 자신은 절대복종자가 된다.

동일시 과정이 발전하면 매우 독특한 형태의 재미가 나타난다. 사실 동일시란 자아와 우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적인 미분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개 팬은 동일시의 즐거움을 얻는 수준에 머무르지만, 보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동일시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기를 원한다. 우상에 대한 자신의 동일시 경험을, 비슷한 다른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동일시의 감정을 더 크게 느낄 수 있다.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팬클럽이다.

팬클럽을 형성해 그 멤버가 되면 응원하기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조직적으로 움직일 수 있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자기 행동에 대한 합리화의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축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집단 구성원이 돼 축구를 즐기게 된다. '하기' 수준의 동일시 과정에서는 팀이나 선수가 우상으로 존재했으나, 팬클럽을 형성했을 때 팀이나 선수는 더 이상 우상이 아니다. 이제 그 관계는 동등한 수준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응원단이라고 말하지 않고 서포터스(supporters)라고 말한다.

팬클럽은 선수나 팀에 자신들의 희망을 요구할 수 있고, 선수나 팀도 팬클럽을 무시할 수가 없다. 팬클럽은 이제 12번째 선수가 돼 완전한 집단 정체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곧 정체성의 즐거움이다. 더불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규칙과 응원 방법 등을 자율적으로 만들어가야 하고, 스스로 만든 그 규칙을 따라야 할 뿐 아니라 축구에 대한 상당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또한 성숙한 동료의식과 충분한 여유 시간이 없으면 멤버십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래서 12번째 선수 되기의 재미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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