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바둑 새뚝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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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남이 흉내낼 수 없는 집념으로 2004년에 크게 약진하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승부사들이 있다.

이창호.이세돌.최철한.조훈현.유창혁.박영훈.목진석.송태곤.조한승.안조영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삼중사중으로 포진한 상황에서도 바늘 끝만한 빈틈을 꿰뚫으며 기적같은 우승을 차지한 프로기사들이 있다. 패기와 투혼, 눈물과 감동이 담긴 승리의 주인공들을 모아봤다.

◆ 박지은과 조혜연=루이나이웨이(芮乃偉)라는 이름은 여자바둑계에선 히말라야처럼 높고 험한 산이다. 두 처녀기사 조혜연(19)5단과 박지은(21)5단이 연초 루이나이웨이라는 고봉을 잇따라 넘었다. 조혜연은 여류명인전 결승에서,박지은은 정관장배 세계여자선수권(개인전) 준결승에서 루이를 꺾으며 나란히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여자기사들이 루이9단의 실력을 겁내 그를 끝내 거부한데 반해 패기넘치는 한국 낭자들은 "루이9단에게 배워 그를 넘어서겠다"며 방랑 기객 루이를 포용했기에 이 승리는 더욱 값지게 보였다.

◆ '랜디 킴'김성룡=이창호 등 천재들에 질려 일찌감치 '보급기사'를 자처하며 TV해설자로 돌아섰던 김성룡(29)9단이 첩첩으로 둘러싸인 강자들의 숲을 뚫고 전자랜드배에서 우승한 것은 2004년의 기적으로 꼽힌다. 준결승에서 김성룡에게 패배한 최철한9단은 또다른 결승 진출자인 김주호4단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보급기사의 2대1 승리. 이후 김성룡은 '랜디 킴'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내년도 세계대회 시드를 확보한 랜디 킴의 또 다른 이변이 기대된다.

◆ 대기만성 이희성=이희성5단은 겨우 22세니까 대기만성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프로기사 10년째인 준 고참(◆ )이다. 무명 시절 매판 몸서리칠 정도의 장고를 거듭하며 뼈를 깎아온 이희성에게 돌아온 별명은 '진드기'. 하지만 올해 드디어 꿈을 깬듯 착착 승리를 쌓더니 지난 8월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에서 감격의 첫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젠 누구도 그를 '진드기'라 부르지 않는다.

◆ 박정상의 재도약=4년 전 프로에 입문하자마자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대회 8강 등 잇따라 쾌거를 올려 크게 주목받았던 박정상(20)4단이 어느날 갑자기 슬럼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박정상은 자나 깨나 바둑만 생각하는 끝없는 공부로 이를 극복했다. 4월의 SK가스배 신예10걸전 우승은 그 부산물일 뿐이다. 어린 시절 말릴 수 없는 개구쟁이에서 이젠 첫손 가는 노력파로 변신한 박정상의 집념이 무엇을 그려낼지 두고볼 일이다.

◆ 승률1위 윤준상=17세 윤준상3단은 올해 전반기 내내 다승.승률 양쪽에서 1위를 달리는 놀라운 약진을 보였다. 다승1위는 최철한에게 내줬지만 승률에서는 현재도 1위(75%)다. 올해 한국리그에서 당당 2장으로 뽑혔고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팀의 상위권 진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는 미래의 기대주.

◆ 유재형의 7연승=독해야 이긴다는 승부세계에서 유재형(27)6단은 사람좋기로 소문난 청년이고 그래서 서서히 잊혀져가는 승부사였다. 4년 전 반짝 결승전에 오르기도 했으나 그후는 영 내리막이었다. 그런 유재형이 올해 한국리그 주전으로 선발되었을 때 모두들 그를 팀의 '아킬레스 건'으로 지목했다. 한데 유재형이 기적같은 전승(7연승)을 거두며 팀을 페넌트레이스 1위로 이끌었다. 착한 성품의 유재형은 단체전만은 꼭 이기고 싶어 매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합에 임했다고 한다. 내년엔 개인전도 그래주기를…….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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