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그대만큼 고운 여자 세상에 없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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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바람이 많이 차가워졌는데 춥지는 않소? 그래도 당신이 있는 파리의 겨울이 이곳 바르샤바보다는 한결 따뜻하니 마음이 놓인다오. 당신이 날 따라 여기까지 왔다면 혹독한 추위를 견디다 못해 날 두고 내뺐을지도 몰라.

당신을 페르라셰즈에 홀로 남겨두고 온 지도 벌써 2년이 넘었구려. 지난 여름 당신을 찾았을 때도 말했지만 당신을 그곳에 둔 것은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오. 생전에 워낙 당신이 파리를 사랑했기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주위의 만류도 참 많았잖소. 고국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말이오. 하지만 같은 파리의 하늘 밑은 아니더라도 당신과 유럽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르겠소. 당신이 한국에 있다면 외국으로 떠도는 내 처지에 1년에 한번 만나는 것도 어렵지 않았겠소.

여보, 혼자 떠나버린 야속한 당신을 생각하면서 왜 "좀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하는 회한에 가슴 저린 지 모르겠소. 알아요. "있을 때 잘하지"라고 말하려는 거. 매주 두 번씩 당신을 병원에 데려가는 게 그렇게 힘들었는데 반신불수가 된 몸에 투석을 하며 8년 넘게 버텨온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렇다고 혜림이가 토론토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마치 한시름 덜었다는 듯 그렇게 훌쩍 떠나버릴 것은 없었잖소.

9년간 연애를 했지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한 사실에 너무 행복했었소. 그래도 살다 보니 당신보다 예쁜 여자가 많이 눈에 띄었는데 당신이 떠나고 난 뒤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그렇다고 너무 자만하지 말아요. 아직은 못 찾았지만 당신만큼 예쁘고 맘씨 고운 사람 만나면 나, 새 장가 갈 거요. 영원히 홀아비로 늙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여보, 피곤한지 눈물이 자꾸 나서 더는 못 쓰겠소. 크리스마스 무렵에 찾아갈게요. 보고 싶소. 사랑하오.

주복룡 폴란드 주재 공사

※주 공사의 부인은 1995년 캐나다에서 신부전증으로 인한 합병증인 뇌출혈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오다 2002년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등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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