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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백화점 한양상회, 망국과 함께 스러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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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대한제국기의 잡화상. 점포 안과 건물 밖 매대 위에 온갖 상품을 늘어놓고 있다. 한양상회 사진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보다 규모가 훨씬 큰 잡화상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현대의 백화점은 이 시절의 ‘양품(洋品) 잡화상’에서 출발했다. (사진 출처 : 『신세계 25년의 발자취』)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근대 도시의 중심에는 왕궁이나 신전이 있었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도 옛 왕궁과 신전이다. 외국의 역사 도시를 찾는 한국인들은 여행 일정에서 오래된 왕궁과 사찰, 교회와 성당을 빠뜨리지 않으며,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 역시 궁궐과 전통 사찰들을 주로 찾는다. 그러나 막상 이들 건물이 주는 종교적 감흥이나 예술적 감동은 기대만큼 크지 않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보다는 다른 곳에서 더 설렌다.

1887년 프랑스 파리에 봉 마르셰라는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매장 면적 2만5000㎡의 규모에 아크등 360개, 백열등 3000개를 설치해 휘황찬란한 빛을 밤거리에 뿌렸던 이 건물은 당대 어느 궁궐이나 신전보다도 화려하고 웅장했다. 에밀 졸라는 그다운 통찰력으로 이 건물의 위상을 정의했다. “백화점은 현대의 신전이다.” 백화점들은 오늘날 세계 거의 모든 도시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백화점을 자처한 최초의 상점은 1908년에 설립된 한양상회였다. “해외 여러 제조장과 특약을 체결하고 참신 유행의 양호품을 수입하며 우리나라 중앙인 한성 종로에 자리하여 장대한 가옥에 화려한 진열로 우리나라 제일 가는 데파트먼트스토아, 즉 최완전한 점포를 이루었나이다”(1910년 1월 1일자 광고). 한양상회는 문방구, 화장품, 양주, 서양 연초, 양복 부속품 등 오늘날의 백화점 1층 매장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취급했다. 지방부를 두어 전국 각지에 행상을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첨단의 마케팅 기법이었다.

1909년 말, 한양상회는 일본어 신문 ‘한성신보’에 광고를 거부하다가 ‘한양상회의 간악 수단’이라는 왜곡 날조 기사로 곤욕을 치렀다. 한국인 실업가들과 민족계 신문은 공동보조를 취해 ‘한성신보’를 규탄했고,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한양상회는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910년 6월 30일부터 1주일 남짓 계속해 민족계 신문들에 반면 광고(당시 신문은 4면 발행이었다)를 실었다. 이 광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이미지 광고이기도 했는데, ‘한국인답지 않은 한국인이라면 모르겠거니와 진정한 대한국인으로 한양상회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우리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도다’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그 두 달 뒤 대한제국이 소멸하자 일본인 및 한국인답지 않은 한국인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한양상회도 괘씸죄에 걸려들었다. ‘우리나라 제일 가는 데파트먼트스토아’는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때의 백화점은 권력의 가벼운 입김에도 속절없이 스러졌으나, 오늘의 백화점들은 ‘현대의 신전’다운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