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41>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40.놀림받고 자란자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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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나의 세 자녀는 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공립학교를 다닌 뒤 미국의 대학에 진학했다. 요셉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우리 집에는 미국기독봉사회에서 파견한 제임스 윌슨 선교사의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다. 윌슨 선교사의 자녀들은 서울의 외국인 학교에 다녔는데 요셉을 그 학교로 딸려 보내거나 미국의 외가로 보낼 수 있었지만 나는 아들을 한국인으로 키우고 싶었다.

우려했던 대로 요셉은 학교에 들어가서 튀기, 아이노꼬, 뺑코라는 놀림을 많이 받았다. 엎드려 자면 코가 납작해질지도 모른다며 코를 방바닥에 대고 잠을 자기도 해 엄마 아빠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 아들을 강하게 키우기 위해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켰다. 처음 주선한 아르바이트는 아이스케이크 장사였다. 요셉이 첫날 아이스케이크통을 메고 종일 돌아다녀 번돈은 60원이었다. 그런데 너무 다리가 아프다며 그 돈으로 택시를 타고 돌아와 첫날 장사는 허탕이었다. 그후 초등학교 때는 여름만 되면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시켰는데, 어릴 때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내 의견에 아내도 찬성했다.

수원시내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할 정도로 현실에 적응을 잘하면서도 아들은 또래 친구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상처를 받았다. 요셉은 모태신앙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예수님을 받아들인 시기를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말한다. 처음으로 도시락을 싸가던 날, 요셉은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학교에 갔다. 모두가 무슨 반찬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하면서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안에는 밥이 아닌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아내는 평소 아이들이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잘 먹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미국식으로 도시락을 싸준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생전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졌고, 막 예민해지는 시기였던 요셉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도시락 뚜껑을 도로 덮고 말았다.

요즘이야 샌드위치가 흔한 음식이지만 1960년대 시골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이상한 음식이었다. 요셉은 그날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또 한번 확인하고 절망했다고 한다. 점심도 안 먹고 집으로 오면서 요셉은 '사는 게 참 힘들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엄마가 도시락도 제대로 못 싸줄 거라면 윌슨 선교사 아이들처럼 외국인 학교에 보내 줄 것이지'하는 원망도 들었다고 한다. 또 미국의 외가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학교 다녀와서 풀이 죽어 있는 아들에게 아내가 연유를 물었다. 요셉의 얘기를 들은 아내는 "예수님도 놀림을 당하셨단다, 나도 놀림을 당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이겨냈다. 예수님은 널 사랑하시고 너를 놀리는 친구들도 사랑하신다"는 얘기와 함께 위로를 해주었다. 요셉은 그제야 어머니도 한국에 와서 많은 고생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어머니처럼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겨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다음날부터 요셉은 반드시 밥이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도시락을 갖고 갔다. 아내도 아이들을 위해 순한국식 반찬을 만드느라 애를 썼다. 요셉은 점점 나이가 들고 신앙이 자라면서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으나 성인이 되어서 또한번 큰 충격을 받았다.

요셉은 수원의 유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대학교 4학년을 마쳤을 때 신체검사 통지서가 나왔다. 1983년에 요셉은 군종이 되겠다며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뜻밖에도 소집 면제라는 결과가 나왔다. "건강에 이상이 없는데 왜 소집면제냐"고 묻자 담당자가 "IQ 85 이하, 초등학교 졸업자, 혼혈아는 면제 대상"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 자리에서 요셉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언제까지 혼혈아라는 딱지가 따라다닐 것인가, 한국인인 내가 왜 군대에 갈 수 없는가 하는 생각에 많이 우울했다고 한다.

요셉은 한국에 살면서 혼혈아로서 유일하게 덕보는 것이 교통경찰이 딱지를 끊으려다 말고 외국인인 줄 알고 그냥 가라고 손짓할 때라고 말한다. 요즘도 요셉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 "한국 말 잘 하시네요"라고 하면 정색을 하며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며 씁쓸해한다.

두 동생은 요셉이에 비해 훨씬 한국적으로 생겨서인지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요셉이 호기심의 대상이 되다보니 동생들은 그냥 묻어서 지나갈 수 있었고, 요셉을 키우면서 겪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 부부가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설과 요한도 마음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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