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헌법기념일 맞아 改憲 공방 "자주 헌법 만들자" 커진 목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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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평화헌법을 지키자. 전쟁의 길을 여는 유사(有事)법제를 반대한다."(호헌파)

"군사권을 다른 나라에 위임하고 있는 헌법을 고쳐 자주헌법을 만들자."(개헌파)

일본의 55회 헌법기념일인 3일,일본 곳곳에서는 헌법 개정을 둘러싼 찬반 집회가 열려 시끌시끌했다.

이날 오후 1시. 도쿄(東京)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는 '헌법을 살리는 모임' 등 8개 시민·종교단체가 '헌법수호·유사법제 반대'집회를 개최했다.3천여명이 행사장을 메웠고, 미처 입장하지 못한 1천여명은 공회당 밖에서 스피커를 통해 연설을 경청했다. 집회 집행위원인 나카고지 기요오(中小路淸雄)는 "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었다"며 "후손들이 전쟁의 참상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미(反美)분위기도 엿보였다. 미국을 비난하는 유인물이 배포됐고, 서명운동도 벌어졌다. 시민단체 '피스뉴스'회원인 마쓰모토(松本)는 "유사법제와 미국의 전쟁확대에 반대하는 서명을 받고 있다"며 "고이즈미 총리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각각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비슷한 시각 일본교육회관에서는 노조·시민단체 등이 만든 '평화·인권·환경 포럼'이 '헌법, 인간의 안전보장과 유사법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도쿄대에선 호헌파 헌법학자들이 만든 '전국헌법연구회'가 강연회를 개최했다.

개헌파들의 집회도 잇따랐다.

개헌파 국회의원들이 만든 '자주헌법을 만드는 의원동맹'과 민간단체 '자주헌법제정국민회의'는 치요다(千代田)구 공회당에서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국민대회'를 공동개최했다. 행사를 주관한 기요하라 준페이(淸原淳平)는 "새로운 시대에 맞춰 헌법을 고쳐야 한다"며 "개헌여론을 확산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21세기 일본과 헌법에 관한 지식인 간담회'는 헌법개정 공개포럼을 열었다.

헌법기념일의 호헌·개헌집회는 매년 되풀이되지만, 올해는 특히 자민당·정부가 유사법제를 국회에 제출한 데다 개헌 움직임도 활발해 대립 양상이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위기에 처할 경우 자위대와 주한미군이 쉽사리 군사활동에 들어가게끔 관련법률을 고치는 일을 말한다.

일본 국회에 2000년 설치된 헌법조사회는 다음달 개헌에 관한 중간보고서도 낼 예정이다. 개헌론의 초점은 전쟁과 군대보유를 금지한 9조 개정이다. 현 헌법이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것도 이 조항 때문. 그러나 보수우익 세력들은 "일본군대를 인정하고, 집단적 자위권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오랜 경제침체로 보수우경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개헌에 동조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는데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이 지난달 1천9백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57%가 개헌에 찬성했다.

헌법 9조가 점차 코너에 몰리고 있는 것이다. 호헌파 학자 등은 이에 반발해 지난달 "직접 개헌작업에 참여해 9조를 지키자"며 '시민헌법조사회'를 만들기도 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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