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 가수의 또다른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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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엄정화(31·사진)가 '패자 부활전'에 올랐다. 26일 개봉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9년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녀는 1993년 데뷔작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참담한 흥행 실패를 이미 경험했다. 이후 언제 누가 영화에 불러줄지 기약 없는 날들을 보내다 이번에 다시 은막의 꿈을 활짝 펼친 것. 따라서 각오도 대단하다. "가수 엄정화가 잠시 곁눈질을 한 게 아니라 배우 엄정화로서의 도전이자 모험"이라고 잘라 말한다.

연기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우연한 기회에 덜컥 데뷔했던 그녀에게 지난 9년의 상처는 컸다. 실패의 쓴 기억을 유전자 정보처럼 지니고 살아야 했던 세월이었다. 데뷔작 이후 '마누라 죽이기'에 잠깐 얼굴을 비췄을 뿐이다.'결혼은, 미친 짓이다'에 그녀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충무로의 반응이 무척 냉담했던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 터다.

그녀가 맡은 역은 좋은 조건을 저울질해 '사'자가 붙은 남편에게 시집가지만 결혼 전 만나던 대학강사 준영(감우성)과의 주말 동거를 병행하는 연희. 어느 쪽 하나 소홀함 없이 완벽한 가정을 꾸려가는 그녀의 솜씨는 남편과 애인에게 해먹이는 맛깔스런 콩나물 비빔밥만큼이나 수준급이다. 불륜이야 TV 드라마에서 흔치 않게 목격되는 소재지만 연희처럼 두집 살림을 버젓이 하는 영화의 설정은 논란이 예상된다. 그녀 역시 그 논란의 핵에 자신이 놓여있다는 점이 꽤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연희와 엄정화를 동일시해 정말 네 연애관이 그러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인터뷰마다 꼭 결혼 제도에 대한 제 의견을 물어 보니 곤혹스럽기도 하고…." 이번 영화는 그녀에게 결코 쉽지 않았다. 대본을 받았을 때 느낌은 그녀의 표현 그대로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감독을 신뢰했고 서로가 '감탱''엄탱'이라 부르며 편하게 지냈던 상대역 감우성을 믿었다고 털어놨다. 촬영 횟수가 거듭될수록 연희의 심리를 파고들 수 있었다고.

"연희는 어른들 말씀대로 결혼하고 정 붙이고 살면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가 공허한 마음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죠. 저처럼 혼기에 이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결혼에 대한 환상도 있었을 거구요." 그녀는 "남자나 여자나, 기혼이나 미혼이나, 각자의 위치에서 연애와 결혼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레 감우성과의 정사 장면이 화제에 올랐다. "영화 찍기 전에 팬클럽 회원들이 정색을 하고 찾아왔었어요. 결사 반대였죠. 항간에서 '엄정화의 몸을 내세워 관객을 끌려 한다'고 의심한다는 것도 알아요. 노골적인 묘사도 들어있죠. 하지만 영화를 보면 제가 쓸데없이 벗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 거라 믿어요."

글=기선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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