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에게 세 아들은… '상상 못할 마음의 빚'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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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어린 시절과 사춘기의 너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너에게 본의 아닌 못할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왔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80년 12월 7일 3남 홍걸(弘傑)씨에게 보낸 편지다.

金대통령은 옥중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없이 가족에 대한 연민을 표현했다. 수시로 "자식들에 대한 나의 죄가 너무도 무거운 것이라는 생각에 비통한 심정"(82년 3월 25일)이라고 밝혔다.

세 아들에 대한 金대통령의 이런 심적 부담이 아들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란 지적이 나온다.

여권 내에서는 이 문제가 정치공방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의견이 퍼져 있다. 청와대 참모들조차 '법대로 처리'라는 의견을 수긍한다. 그렇지만 "이런 金대통령의 심정을 아는데 아들을 법대로 처리하라고 건의할 참모가 어디 있겠느냐"고 한 여권 인사는 말했다.

결국 金대통령의 결단밖에 해법이 없는 셈이다. 그러나 金대통령이 너무 자식에 대한 정(情)에 얽매여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올 초 각종 게이트에 아들들의 연루설이 제기됐을 때도 金대통령은 세 아들로부터 '결백하다'는 해명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했었다.

세 아들 가운데서도 최규선(崔圭善)게이트에 연루된 막내 홍걸씨에 대한 金대통령의 애틋함은 각별했다. 金대통령은 옥중 서신에서 "그 중에서도 네가 겪은 시련은 특별한 것"(80년 12월 7일), "홍걸이 처지는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81년 2월 21일)고 썼다.'폐쇄적 성격'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다.

초등학생 때 金대통령의 납치사건을 겪고, 중학교 3년 동안 아버지가 감옥에 있었고, 고등학생이 돼서는 아버지가 연금되고,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아 수감된 것을 보아야 했다는 사실을 일일이 꼽아가며 안타까워했다.

아태재단 부이사장인 차남 홍업(弘業)씨에 대해서도 "만 30세가 넘도록 아버지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두번이나 결혼의 길을 잃었으며… 직장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너의 행복과 전정(前程)을 가로막는 결과만 빚어내고 있으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고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내란음모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 복역 중인 장남 김홍일(金弘一)의원이 81년 4월 14일 처음으로 청주교도소에 있던 金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는 사흘 동안 편지를 열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지냈다고 한다.

그 당시에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까지 불편한 金의원에게는 항상 빚을 진 심정임을 토로해 왔다. 金의원에 대한 공천이 문제될 때마다 "나 때문에 50이 넘도록 번듯한 직장생활 한번 못했다"며 고개를 젓곤했다.

97년 대선 때 목포지구당을 방문한 金대통령은 '그림이 좋지 않다'는 참모들의 주장 때문에 지구당위원장인 金의원과 악수조차 못하고는 그날 저녁 체했다.

이런 金대통령과 아들의 관계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유혹은 정권 초기부터 계속됐다. 金의원도 99년 "대통령의 아들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었다.

권노갑(權甲)전 고문은 최규선씨와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홍걸씨도 함께 불러 "이제 두 사람도 만나지 말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진하고 심성이 여린 홍걸씨는 崔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한 혈육인 홍걸씨에 대한 이희호 여사의 지나친 보호가 적절한 통제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김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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