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용범 해양수산부 심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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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3면

'색소폰과 공무원'.

뭔가 들어맞지 않는 조합인 듯싶지만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에서 후배들에게 색소폰 연주를 전수하며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해양수산부 산하 중앙해양안전심판원 허용범(許龍範·51)심판관(국장급)은 벌써 35년째 취미생활로 알토 색소폰을 불고 있다.

중학교 시절 가수 조용필씨와 영화배우 안성기씨가 같은 반 친구였던 그는 이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1967년 경동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밴드부에 들어가면서 알토 색소폰을 처음으로 잡게 됐다.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비슷한 악기가 바로 알토 색소폰입니다. 두 손에 딱 잡히는 자그마한 크기가 맘에 들었죠. 한번 불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무아지경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마도로스의 꿈을 안고 해양대로 진학한 그는 교내에서도 그룹사운드 '노티칼26'에서 기타 연주자로 활동하는 등 클라리넷·플루트 등 못 다루는 악기가 없는 만능 음악인이다.

대학 졸업 후 10년 동안 초대형 LNG 운반선 선장을 끝으로 배에서 내릴 때까지 세계 50여개국을 누볐던 그는 선상에서도 항상 아코디언을 가지고 다니며 음악을 벗삼아 바다를 내달렸다."잔잔한 바다를 지나거나 거센 파도가 이는 폭풍우 속을 뚫고 나갈 때마다 바다가 인간의 감정처럼 변화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같은 감정의 기복을 찬찬히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고나 할까요."

83년 해양수산연구원 창설요원으로 참여하면서 육상근무를 시작한 그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색소폰 연주 취미에 빠져들게 됐다. 94년 해양사고의 원인을 규명하는 해사 행정 심판기구인 해양안전심판원의 심판관으로 옮겨 해마다 5백여건 이상이나 되는 각종 해상사건을 다루면서도 시간만 나면 색소폰을 잡았다.

가끔씩 노래방에서 가서 흘러나오는 연주에 노래 대신 색소폰을 불어보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취미다. 자신의 18번은 은은한 중저음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대니 보이'. 94년부터 4년 동안 40여명으로 구성된 서울 윈드 젤로소 앙상블이라는 아마추어 관현악단에서 알토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요즘도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고등학교 밴드부 선후배들 10여명이 종로의 한 스튜디오를 빌려 화음을 맞추고 있다. 직업은 제각각이지만 관악기가 좋아 모인 이들이다. 지난해 연말에는 한 예식장을 빌려 가족들을 초청, 조그마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최근 그는 해양부 인터넷 게시판에 관현악을 배울 후배들을 모집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읽고 모인 5명의 '수제자'들이 매주 한번씩 일과 후에 해양부 청사 지하 창고에서 그의 지도로 색소폰 연주를 기초부터 배우고 있다."클린턴 대통령도 색소폰을 불며 유세에 나섰다"며 색소폰 예찬론을 펼치는 그는 "음악이야말로 조직 문화를 유연하게 만들어주는 활력소"라고 강조한다.

"손가락 운동에서 악보와 음감을 유지하는 기억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훈련이 되기 때문에 관악기 연주자들은 말년에 치매에 걸린 사람이 없답니다. 이제부터라도 한번 색소폰 연주를 배워보세요. 하루 하루가 다르게 느껴지실 겁니다." 앞으로 2~3년 뒤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알토·테너·바리톤 색소폰으로 이뤄진 색소폰 앙상블을 이뤄 조그마한 연주회를 여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다.

글=홍병기·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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