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하면 어차피 대사면" 파리시민 주차위반 밥먹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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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프랑스 대통령 선거 1차투표를 사흘 앞둔 18일 오후 파리 도심 트로카데로 광장. 주차금지 지역에 버젓이 세워진 서너대의 차량에 주차위반 딱지가 나란히 붙어 있다. 잠시 후 나타난 30대 초반의 운전자는 자신의 차 앞유리창에 끼워져 있던 딱지를 바닥에 버린 뒤 차에 올라탄다.아무 거리낌이 없다.

"나중에 할증된 범칙금 청구서가 날아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될대로 되라지"라는 말을 남기고는 휑하니 떠나버린다.

거기서 멀지 않은 프랑스 국영 라디오 방송국 앞 도로에도 버려진 스티커들이 나뒹굴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이 스티커를 던져버리고 떠난 자리에 곧바로 또다른 차가 들어선다. 운전자에게 "앞차도 여기 세웠다가 딱지를 떼였다"고 친철히 말해줬더니 자신의 구두에 밟혀 있는 스티커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웃는다. 걱정도 팔자라는 표정이다.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렇듯 파리의 주차위반 단속은 엄격한 편이다. 특히 복잡한 도심에서는 비상등을 켜둔 채 몇분만 운전석을 비워도 주차위반 딱지가 붙어 있기 일쑤다. 범칙금도 세다. 단순 불법주차의 경우 35유로(약 4만원)지만 제 기간에 내지 않으면 할증금이 붙어 4백유로 이상까지 올라간다. 그래도 안내고 버티다가 재산이 차압되는 경우도 있다. 뭘 믿고 파리지앵들이 이처럼 대담해진 걸까.

대통령 선거 때문이다.대통령이 취임을 하면 대사면령을 내리는 것은 프랑스 제5공화국의 전통이다. 사면 대상은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도로교통법 위반 등 경범죄다.

조금만 기다리면 사면될 게 뻔한데 누가 범칙금을 내겠는가. 그래서 대통령 선거가 가까워지면 딱지를 떼여도 범칙금을 내지 않는 것이 상식이 된다. 규정대로 담배가게에서 범칙금만큼 수입인지를 사 엽서에 붙여 보내는 이들은 그야말로 '새가슴'들뿐이다.

당연히 단속도 느슨해진다. 올 3월까지 주차위반 단속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 가량 줄었다.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딱지를 떼고 있던 주차단속원 이자벨(28)은 "제대로 주차된 차량은 주차시간을 넘겼더라도 그냥 넘어가고 불법주차도 교통소통에 크게 방해되는 경우만 단속한다"고 귀띔했다.

사면 전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범시민'들도 있다. 사면을 악용해 도로교통법을 경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 교통안전협회는 "신호위반·과속 등 인명사고의 위험이 있는 불법행위까지 사면하는 것은 교통사고 피해자나 그 가족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나 리오넬 조스팽 총리 중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타인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중대한 도로교통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까지 사면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차위반이 사면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은 '제로'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유를 추구하는 프랑스인들에게 대선은 꽉 막힌 규정으로부터 '기분좋은 일탈'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기분을 잡치는 범칙금 스티커를 사정없이 찢어버리는 그 유쾌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같은 즐거움을 시민들로부터 빼앗는 대통령이 어찌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느냐는 게 프랑스인들의 프랑스인들다운 생각이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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