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15) 서부 건맨과 공산주의자의 대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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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협상은 말 그대로 협상이다. 상대가 내놓는 변수(變數)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공산주의자들은 심리전의 명수다. 집요할 정도로 상대의 약점만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내가 해방 정국의 평양에서 체험한 김일성 중심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랬고, 책에서 공부한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그랬다.

단순하면서 우직한 서부의 건맨들이 이쪽에서는 주류를 이뤘고, 기습적인 남침으로 일거에 대한민국을 위기에 몰아넣은 북한군의 수뇌부와 기습·매복·우회·포위 전술로 늘 아군을 심리적 공황에 빠뜨린 중공군이 저쪽의 회담 대표였다. 아무래도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갈 분위기였다.

1951년 7월 10일 첫 휴전회담이 열린 개성 내봉장의 모습. 99칸짜리 한옥이다. 북한군 참모장교들이 서류를 들고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미 육군부 자료]

중공군이 제안한 회담 장소인 개성에는 내봉장(來鳳莊)이라는 곳이 있다. 개성의 부자가 소유했다는 99칸짜리 한옥이다. 적이 차지하고 있는 개성에서도 북쪽에 있는 건물이었다. 왜 회담장을 이곳으로 정했는지 다소 불안한 심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1951년 7월 10일 아침 회담이 시작됐다. 대표단 일행은 평화촌에서 간단하게 회합을 했다. 헬리콥터에 몸을 싣고 개성으로 향하기 전에 우리를 찾아온 유엔군 총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이 당부의 말을 했다. 그는 “우리는 강대국이다. 저들에게 당당히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늘 그랬듯이, 미국의 자존심을 크게 강조했다. 가장 우수한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지닌 나라의 대표로서 자긍심을 지니고 회담을 진행해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나는 야전 군복 차림에 먼지나 흙이 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쓰는 방진경(防塵鏡)을 철모 위에 걸쳤다. 누가 이렇게 입으라고 권한 것은 아니었다. 회담장에서 내 나름대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장식들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골랐다.

대표 모두에게 손거울 하나씩이 지급됐다. 이는 비상용이었다. 회담은 적이 점령하고 있는 개성에서 열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사시에 대비해야 했다. 언제 어떻게 마수(魔手)를 드러낼지 모르는 사람들이라, 저들이 돌변해 대표진을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미리 상정해 지급한 물품이었다. 고립되거나 공격을 당할 때 이 손거울을 햇빛에 반사시켜 공중의 미 공군기에 구조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먼저 내봉장에 도착하기 전에 인삼관(人蔘館)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휴전회담에 임하는 아군의 전진기지였던 곳이다. 우리는 헬기로 인삼관에 내려 육상으로 온 실무진과 합류해 다시 지프에 옮겨 타고 내봉장으로 갔다.

내봉장은 아름다운 한옥이었다. 그러나 전쟁 통에 폭격을 맞았기 때문인지 한쪽이 크게 부서져 있었다. 본채 지붕에도 구멍이 크게 나 있었다. 회담장은 어수선했다. 들어가는 길목에는 북한군과 중공군 관계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들의 회담 대표는 이렇게 짜였다. 수석대표는 남일 중장이었다. 그는 당시 북한군 총참모장을 맡고 있었다. 이상조 소장과 장평산 소장이 북한군 대표로 남일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중공군 대표로는 덩화(鄧華) 부사령관, 셰팡(解方) 참모장 겸 정치위원이 회담에 참석했다. 남일과 이상조, 장평산은 모두 북한군 수뇌부에서도 핵심 인물이었다.

중공군 대표인 덩화와 셰팡은 모두 한국 전선에 대병력을 이끌고 뛰어든 펑더화이(彭德懷) 총사령관의 심복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우리 측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은 북측의 수석인 남일과 마주 앉았다.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저들이 북쪽에, 우리는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조이 제독 옆에 앉은 내 맞은편에는 이상조가 앉아 있었다. 악수나 인사조차 없이 회담은 아주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했다. 조이 제독은 북측 대표에게 먼저 신임장을 보인 뒤 “전투는 계속 진행한다. 그러나 회담은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발언했다. 서부 건맨 식의 통보였다. 원칙을 천명하고 그에 따라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미군의 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된 발언이었다.

휴전회담장에 나온 북한 여군 중사의 모습.

그러나 북한군과 중공군은 그런 말이 별도로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을 하거나 말거나, 당시 형성된 전선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펼쳐 저들에게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을 것이다.

서부 건맨 스타일의 우리 측 회담 방식과 저들의 집요한 심리전 및 기만 전술은 곧 충돌할 조짐이 뚜렷해져 갔다. 회담장 분위기는 그 점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선 양측 대표 각 5명이 서로 마주 앉은 테이블이 이상했다. 저들이 높아 보였고, 우리는 밑에서 위로 저들을 쳐다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열리는 회담장을 임의대로 꾸민 것이었다.

자신들이 앉는 의자를 높은 것으로 했고, 우리가 앉는 의자는 그보다 키가 낮은 것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테이블 위의 깃발도 자신들의 것을 더 크게 만들어 놓았다. 회담 석상의 공산주의자들이 벌써 조잡한 심리전으로 도발해 온 것이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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