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슬로바키아 타트라 국립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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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슬로바키아 타트라 국립공원의 고지대에 들어서자 황사로 막혔던 숨통을 틔워주는 듯한 상쾌한 풍경이 차창 속으로 뛰어들어왔다.

손으로 쥘 수 있을 것처럼 줄기는 가늘지만 하늘을 가릴 듯이 곧게 뻗어오른 침엽수들, 깎아지른 듯한 능선이 만드는 장엄한 굴곡, 산과 나무를 온통 덮어버린 하얀 눈, 물이 뚝뚝 떨어져내릴 것 같은 푸른 하늘. 차갑고 맑은 '북쪽나라'의 무공해 자연이 거기 있었다. 나무·산·눈, 그리고 하늘이 만들어 낸 '자연의 변주곡'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닮은 진초록 나무 전체를 고운 분가루같은 눈이 살포시 덮고 있는 모습을 스쳐 지나면 눈 속에 폭 파묻힌 어린 나무가 끄트머리만 살짝 내밀고 있다. 커브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새로운 풍광 때문에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창가에 바짝 몸을 붙였다.

손에 잡힐 것처럼 차창밖으로 이어지는 3백여개의 봉우리는 태고(太古)의 신비를 담고 침묵한다. 눈으로 두텁게 덮인 산정(山頂)위로 드리운 거대한 구름의 그림자가 서서히 흘러간다.

길은 한적하다. 정적과 아름다움만이 있는 이계(異界)로 들어서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거침없이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내려오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란 것도 그 때문이다. 소박한 리프트 시설과 눈비탈만으로 이뤄진 스키장은 풍경의 일부처럼 녹아 있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4월 말까지 자연설이 쌓이는 타트라 산맥에는 이처럼 자연 그대로의 스키장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대자연과 하나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데다 5천~1만원 정도로 요금이 저렴하기 때문에 방학이면 유럽 곳곳에서 학생들이 스키를 즐기러 온다. 여름에는 눈내린 높은 산들을 배경으로 노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길가에 산악자전거 행렬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럽의 캠프장'역할을 하고 있는 타트라의 맑은 공기 속에서 스포츠를 즐기는 것도 유쾌하겠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미묘한 풍경을 미끄러져가듯 두어시간 드라이브하는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해발 2천m에서부터 시작되는 타트라 산맥의 웅장하고 유려한 변주곡이 잦아드는 지점에 슬로바키아 중부의 중심지 반스카비스트리차가 있다.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지어진 회색 건물들이 살풍경한 거리를 걷다가 구 시가지에 접어들자 마치 놀이동산에 들어선 것처럼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자그마한 광장 주위에 늘어선 노랑·연분홍·하늘색의 파스텔톤 건물은 동화 속에서 나온 것 같다. 구(舊)동구권에서 보기 드문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발걸음을 옮기면 나치 독일에 대항해 격렬하게 일어났던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기념박물관 앞에 당시 독일군의 전차가 세워져 있다. 녹슬었지만 여전히 섬뜩한 느낌을 주는 전차 위에 어린 아이 예닐곱명이 올라타 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에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리다 독립한지 10년도 안되는 신생국 슬로바키아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끝>

슬로바키아=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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