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모노 입고 '화려한 외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한국 배우로는 처음 일본 연극에 출연하기 위해 한달간 도쿄에 머무르고 있는 김성녀(52·극단 미추)씨와 지난달 29일 전화 인터뷰를 했다. 김씨는 3~11일 명문 하이유자(排優座)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게이오(慶應) 모년(某年) 조각 구름'에 출연한다.

짧지 않은 한·일 연극 교류사에서 공동 작업을 통한 양국의 배우 교류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순 일본 극단의 초청을 받아 일본어로 일본 배우와 공연하는 예는 김씨가 처음이다.

김씨는 "처음이라는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기 죽지 않고 한국 배우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평소보다 수십배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했다. 오전 12시부터 오후 9시까지 계속되는 강도 높은 연습으로 입이 부르트는 등 컨디션이 말이 아니라고 했으나,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목소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낭랑하고 씩씩했다.

"어려운 점은 역시 익숙하지 않은 일본말이다. 평소 회화 정도는 불편이 없었으나 연극에서는 에도(江戶)시대의 고어(古語)를 쓰다보니 특유의 억양 때문에 골탕을 먹고 있다."

김씨의 출연작은 '벽 속의 요정' 등 화제작이 많은 일본의 중진 극작가 후쿠다 요시유키가 쓰고 연출했다. 어느 항구에서 벌어지는 삼각사랑 얘기인데, 김씨 역은 여주인공 '오초(나비)'다. 연극에서는 항구에 흘러들어온, 한국인인지 중국인인지도 모르는 그저 신비한 아시아 여인으로 묘사된다. 이 여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전쟁·권력·사랑의 파노라마다. 김씨는 "실제 나이보다 반도 안되는 스물세살 처녀로 돌아가니 날아갈 듯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씨의 일본 진출은 이미 2년 전에 결정됐다. 학전의 김민기씨와 '벽 속의 요정'의 한국 공연을 상의하기 위해 왔던 후쿠다가 김씨의 마당놀이를 보고 반해 '가창력을 겸비한 신비한 여인'으로 그녀를 낙점했다.

"노래가 강조되는 '일본식 뮤지컬'이다. 노래도 혼자 네 곡을 부른다. 게다가 각종 기모노를 여덟번이나 갈아 입으며 화려한 변신도 해야 한다. 팔자 걸음걸이 대신 안짱다리로 종종대며 걸어야 하고. 한마디로 극중에서는 완전한 일본여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김씨는 "연습은 고됐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다. 평소 좀 낮게 보던 일본 배우의 기량에 대한 평가도 바로 잡았다. "일본 배우들은 우리보다 역동적인 표현력 등이 뒤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표현 방법과 정서의 차이일 뿐 못하는 게 아니었다. 꿈을 먹고 사는 동지이자 연민을 함께 공유한 '연극 가족'일 뿐이었다."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