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공대 출신 연극인 1호 배요섭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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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광대 기질을 어쩔수 없었다. '그래 고급 딴따라가 되자'. 주저 없이 사표를 내고 아무도 모르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원서를 냈다.

연극원에서 만나 결혼한 부인 이현주씨. 그는 의기투합한 새 인생의 동반자다. "감동으로 벌렁벌렁 심장이 뛰는 연극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면서 만들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광대의 꿈입니다."

프리랜서 연극 기획·홍보 담당인 황정덕씨는 최근 포항공대 홍보실에서 걸려온 뜻밖의 전화 한통을 받았다.

"우리 물리학과 졸업생인 배요섭씨가 지금 뭐하고 있는 지 아세요?"

한마디로 이 '특이한' 졸업생의 근황이 궁금하다는 거였다.

황씨는 황당했다. 순간 '하필이면 왜 매니저도 아닌 나한테 소식을 묻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연극계, 특히 미래 꿈나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 꿰고 있는 '마당발' 황씨의 그물에 배요섭도 걸려들었을 것이라는 학교측의 짐작은 사실과 맞아 떨어졌다. 실제로 황씨는 배요섭 일단(一團)의 후견인이다. 그는 최근 배요섭이 '연극 1번지' 대학로에 입성하도록 도왔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이는 포항공대 물리학과 출신의 배요섭(32)씨. 그는 미국으로 유학해 어느 명문대에서 박사학위를 딴 뒤 귀국, 대학교수나 연구원이 돼 있어야 한다. 오늘도 내일도 불철주야 연구에 열중해야 한다. 그것이 주변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 수준 아닌가. 그러나 배씨는 엉뚱한 길로 샜다. 그는 1994년 포항공대를 졸업한 뒤 한 기업체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곳이 가지 못할 길임을 이내 깨달았죠."

그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꿈틀댔다. 바로 광대 기질이었다.

"한번 생각이 바뀌자 새 삶에 대한 욕구가 용솟음치더군요. 걷잡을 수 없었죠. 결국 '고급 딴따라'가 돼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97년 아무도 모르게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입학원서를 냈는데 덜컥 합격했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당황해 했으나 나무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현재 키르기스스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이후 그에겐 '연극원 4기(연출 전공)'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대학 시절 풍물패에서 장구를 치며 얼치기 광대 맛을 들였는데 그게 인이 박혔나 봅니다."

그는 부인 이현주(30)씨를 연극원에서 만났다. 이씨는 2001년 연출 전공 졸업 동기 네명 중 한명이다. 그녀는 성균관대 국문과를 나왔다.

3년 전 결혼한 배요섭-이현주 부부는 극단 '뛰다'의 연출·무대감독으로 한 길을 걷고 있다.

최근 인형극 '하륵이야기'를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선보였다. 이야기나 풀어내는 형식 등 모든 게 신선하다는 평을 들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자식없던 노부부에게 하륵이라는 '신의 선물'이 태어난다. 이 할멈과 할아비는 나무신령의 명을 받들어 이슬만 먹여 키운다. 그러던 어느날 하륵은 쌀밥을 달라고 조른다. 결국 하륵의 갈망에 굴복하는 노부부. 그러자 하륵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닥치는대로 먹어치우는 '괴물'로 돌변한다.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자 하륵은 할미·할아비 품으로 돌아온다. 노부부는 스스로 하륵의 밥이 돼 세상을 진정시킨다.단 '뛰다'는 이 부부와 연극원 동기 대여섯명이 의기투합해 지난해 만들었다. 벌렁벌렁 심장이 '뛰는' 연극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면서' 만들자는 뜻에서 극단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단원들은 지난 1년간 참 열심히 뛰었다. 서울 중계동 근린공원에서 충남의 태안중학교에 이르기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 자유로움이 '뛰다표' 연극의 특징이다.

"연극은 놀이입니다. 우리는 그 놀이판의 놀이꾼일 뿐이죠. 놀이꾼의 숙명은 세상의 부름을 찾아 나서는 겁니다. 무대가 있으면 달려가서 그들과 일체가 되는 거죠."

극단 '뛰다'는 전통의 가면극·인형극 등을 응용한 마당극 스타일의 총체극을 지향한다. 단원들은 버린 옷이나 쓰레기 등을 모아 의상을 깁고 소품을 만들고 무대를 제작한다. '리사이클링 연극' 혹은 '에코(환경)연극'이랄까.

"반이성적·비논리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 없이 논리의 세계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물리학에서 배웠습니다. 연극은 반이성적·비논리의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 과학적 논리성을 구축하는 게 내 연극의 목표죠."

잘 나갈 수 있던 물리학도가 이제 연극을 통해 세상에 보시(布施)하고 있다. 그 곁의 아내와 함께 따로 또 같이.

정재왈 기자

배요섭

▶1970년 서울 출생

▶94년 포항공대 물리학과 졸업

▶99년 이현주씨와 결혼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연출 전공)

이현주

▶1972년 전남 순천 출생

▶95년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연출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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