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영화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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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25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은 사상 처음으로 흑인 배우가 남·여 주연상을 모두 수상해 화제가 됐다.

시상대에 오른 덴절 워싱턴과 핼리 베리는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고 단하의 하객들은 기립박수로 기쁨을 함께 했다.

시상식을 보면서 기자는 2년 전 '허리케인 카터'로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 덴절 워싱턴을 인터뷰한 기억이 떠올랐다. 허리케인 카터는 복싱 선수로 활동하다 살인 누명을 쓰고 22년간 복역했던 인물이었다.

자신이 연기한 주인공이 억울한 사연을 가진 탓인지 워싱턴은 "배우로서 얼굴이 꽤 알려진 나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택시 승차를 거부당한 적이 있다"며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기자가 놀란 건 그 다음 대목이었다.

"우리 시대는 단지 인종 문제만 있는 게 아니다.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살찐 사람과 날씬한 사람 등 모든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눠 어느 한 쪽이 다른 편을 부당하게 배제하고 괴롭힌다."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만 과장해서 부각하려 하지 않고 세상을 폭넓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이었다.

이어 그는 정치나 시민운동을 할 생각이 없느냐는 우문(愚問)에 "나는 배우로서,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일이 재미있고 그 일밖에 모른다. 정치는 정치가들의 몫이다"라며 단호하게 받았다.

한마디로 워싱턴은 영화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었다. 영화가 사회를 바꾸는 직접적이고 혁명적인 무기는 되지 못하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부당한 현실은 바뀌어야 하고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는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음달 4일부터 12일까지 서울에서는 제4회 여성영화제(www.wffis.or.kr)가 열린다. 워싱턴의 논법을 빌리면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주류에서 배제되고 고난을 당하는 쪽이라 하겠다.

이번 영화제는 그들의 고된 몸짓과 목소리를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 같다. 흑인 영화를 흑인 관객만 보는 게 아니듯, 여성영화제라 해서 수염난 이들이 못갈 이유는 없을 게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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