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이인제> '불공정 게임'부각… 거취 명분 쌓기 : '음모론' 강공 배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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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주자인 이인제(李仁濟)후보가 '음모론'을 증폭시키고 있다. 당내 경선의 공정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운신할 여지와 명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자신의 정치생명, 민주당 국민경선제, 향후의 정계구도 등 많은 것이 걸려 있다.

李후보측 김윤수(金允秀)특보는 26일 낮 기자실을 찾아와 '음모론'을 한층 발전시켰다. 먼저 대구·경북 경선을 열흘 앞두고 김중권(金重權)후보가 전격 사퇴한 점을 지적했다. 노무현(盧武鉉)후보에게 영남표를 몰아주려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의혹이다.

오후에는 "경선이 계속되려면 청와대 박지원(朴智元)수석이 사퇴해야 한다"며 아예 배수진을 쳤다.

하지만 오전까지만 해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김기재(金杞載)경선대책위원장이 주재한 현역 의원 17명의 대책회의는 "음모론을 더 이상 제기하지 말고 경선은 끝까지 가자"고 결론내렸다. 그런데 李후보는 오히려 음모론으로 날을 세웠다. 오후에 李후보의 서울 자곡동 자택을 방문한 전용학(田溶鶴)의원도 "李후보가 아주 단호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李후보의 캠프에선 한때 "경선을 포기하면서 盧후보의 승리를 인정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음모론을 다시 거론한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옥쇄(玉碎)를 각오하고 전면전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측근인 한 초선 의원은 "여론이나 당내 분위기는 음모론에 대해 거부감이 있지만 李후보가 워낙 완강하다"고 말했다.

李후보가 극단적인 선택으로 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감정적 배신감이다.

李후보는 "나는 국민신당을 이끌고 국민회의와 합당해 민주당을 탄생시켰고, 16대 총선에선 민주당을 전국 정당으로 만들었다"고 강조해왔다. 민주당은 자신에게 빚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경선에서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은 '배후가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李후보는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李후보의 행보에는 6월 지방선거 이후를 겨냥한 장기적인 전략도 깔려 있는 것 같다. 노무현 후보는 그동안 "기득권을 포기하더라도 정계개편을 하겠다"고 주장해왔다. 또 지방선거에서 지면 책임론 대두 등 적지 않은 변화가 예상된다.

따라서 李후보는 당장은 여론의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이 '패배자가 아니라 희생자'임을 분명히 해두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향후 정국변화에 대응해 움직일 여지가 생긴다는 생각이다.

김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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