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나·허정무의 월드컵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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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전이 끝난 뒤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좋으면서도 괴롭다고 해야 할까. 첫 경기를 이기면 마음이 편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더 떨리고 불안하다. 사람들은 “이제 좀 편하게 봐도 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걱정이 된다.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 “얘, 정말 축하한다. 이제 얼굴 좀 보자” 하면 나는 “축구가 한 경기만 있는 줄 아니? 아직 조별 예선도 두 경기나 남았어. 나중에 대회 다 끝나면 보자”고 대답한다. 남편(허정무 감독)도 “우리 샴페인을 먼저 터뜨리지 말자”고 말한다. 매일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서로 축구 얘기는 하지 않다가도 ‘김칫국 먼저 마시지 말자’는 얘기만은 한다. 남편은 나보다도 훨씬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아르헨티나전, 나이지리아전 결과가 어떻게 될지 솔직히 알 수 없지 않은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편이 이끄는 대표팀은 2승1패를 하고도 탈락한 적이 있다. 나도 축구 감독 아내로 경력이 꽤 쌓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기 때문에 이런 일로 들뜰 수가 없다. 오늘은 아르헨티나전이 열린다. 아르헨티나는 우리와 월드컵에서 두 번째 만나는 팀이다. 처음 아르헨티나와 만났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남편은 선수로 뛰었다. 그때 남편은 세계 축구를 휘어잡던 마라도나를 전담 마크했다. 어찌나 열심히 마라도나를 쫓아다니며 괴롭혔는지 국내외 언론이 남편의 수비를 보고 ‘태권 축구’라고 이름을 붙였다. 재미있게도, 이번에는 감독 대 감독으로 마라도나를 만난다. 얼마 전 마라도나 감독이 인터뷰에서 “허정무 감독을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고 피식 웃음이 났다. 그때 호되게 당한 걸 되갚아 주고 싶어서 무리수라도 둬 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때 아르헨티나에 마라도나 감독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리오넬 메시가 있다. 아르헨티나전을 앞두고 신문은 온통 리오넬 메시 얘기다. 처음엔 메시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두근했지만 이제는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모든 기사를 꼼꼼히 읽고 있다. 어제 아침 중앙일보를 보니, 스페인 바르셀로나FC 유소년 팀에서 메시와 함께 축구를 했던 정인성씨의 글이 실렸다. 어릴 적 신장 1m50㎝를 넘기 힘들다는 진단을 받고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을 했고, 신체적으로 불리한데도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큰 선수들을 순식간에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선수, 박수를 보내고 싶은데 하필 적이다. 이런 선수가 왜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났을까,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지난해 1월 남편은 국제축구연맹(FIFA) ‘올해의 선수’ 선정 투표 때 메시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 그때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을 땐데도 남편은 “메시 같은 선수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가 “왜 메시가 최고야?” 하고 물으면 “메시는 키는 작지만 빨라. 상대 중심을 무너뜨리는 드리블을 구사할 줄 아는데 이타적인 플레이를 해”라고 설명을 해줬다. 그렇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인생 최고로 중요한 순간에 적으로 만났다. 하지만 제 아무리 아르헨티나라도 약점은 있을 것이다. 그리스전에서 투지 넘치는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나는 욕심이 커졌다. 그때 그 경기력이라면 메시든, 테베스든, 이과인이든 누구라도 다 막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특히 우리 주장 박지성 선수는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메시를 성공적으로 막은 적이 있다고 하니 든든하다. “캡틴 박, 한 번만 더 메시를 꽁꽁 묶어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싶다. 이번 경기에서는 특별히 박주영 선수가 꼭 골을 넣었으면 한다. 그리스전에서 박주영 선수가 몇 차례 골문 앞에서 기회를 잡았는데 결정은 짓지 못했다. ‘자신감이 떨어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박주영 선수를 열렬히 응원했다. 그리스전에서는 미처 골을 넣지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전에서 통렬한 한 방을 터뜨리고 자신감을 한껏 충전했으면 좋겠다. 아르헨티나전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한다. 어쨌든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오늘 밤, 또 한번 이변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리스전이 열리던 날, 비가 내리는데도 우산도 쓰지 않고 시청 광장에, 한강 시민공원에, 코엑스 앞에 모여서 대표팀을 응원해준 팬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린다.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남편이 꼭 16강 염원을 이뤄줬으면 좋겠다. 정리=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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