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한반도 안보위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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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근 2003년 안보위기론이 여러 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해주는 일련의 불길한 증후군들이 가시화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과 최근 공개된 미국의 '핵 태세 검토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의 핵 전략이 핵 불사용에서 핵 선제공격으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다. 또한 북한과 중국을 포함한 7개 불량국들이 잠재 공격 대상국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가공할 만한 발상의 전환이라 하겠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멜리사 프레밍 대변인과의 최근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 내용 역시 마음에 걸린다. 북한이 IAEA 핵사찰에 대해 그리 협조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북한 핵시설을 완전 사찰하려면 최소한 3~4년이 걸리기 때문에 북한에 대한 핵사찰이 조속히 착수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발전에 대해 북한의 반응은 매우 민감하다. 북한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의 핵 공격 계획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북한의 핵 동결과 사찰 수용을 기본 골자로 하는 1994년의 제네바 합의를 전면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핵 공격을 최대의 안보위협으로 간주해온 북한으로서 이는 지극히 예견할 수 있는 반응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과 관련한 미·북간의 마찰 또한 우려되는 대목이다. KEDO는 제네바 기본 합의에 의거, 2003년까지 2천Mwe 용량의 경수로 한 기를 북한에 제공키로 돼 있다. 그러나 현재의 공정으로 보아 적기 공급은 어렵다. 북한은 경수로 건설 지연으로 인해 2003년부터 입게 되는 2백만㎾의 전력손실을 보상해주지 않으면 흑연감속로를 되살릴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핵 사찰 사안에 있어서도 북·미간 격차는 크다.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경수로 사업이 상당 부분 완성된 후 핵심 부품 도착 이전에 IAEA의 핵사찰을 전면 수용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공정으로 보아 2005년에 가서야 이 단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측은 과거 핵을 포함한 모든 핵시설에 대한 즉각적 완전 사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야만 지연보상은 물론 포괄적 유인책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존 볼튼 미 국무차관은 얼마 전 북한이 핵사찰에 미온적일 경우 미국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도 있다는 강경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이같은 마찰이 제네바 합의의 파기와 북한이 현재 유보 중인 대포동 2호의 시험발사와 맞물릴 경우 한반도는 94년보다 훨씬 심각한 핵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시 행정부가 대북 응징수단으로 저위력·소형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발전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확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03년의 안보위기는 막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이 변해야 한다. 사실 KEDO 사업 지연의 상당 부분 책임은 북한에 있다. 따라서 지연의 책임을 KEDO에 일방적으로 전가하지 말고 핵사찰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동시에 남북한 관계의 복원을 통해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9·11 사태 이후 변화된 국제정세 아래에서 과거와 같은 벼랑 끝 협상 전술은 오히려 큰 화를 자초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신중해야 한다. 제네바 합의에 명시돼 있듯이 협상 대상으로서의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을 보장해줘야 한다. '악의 축' 발언과 '핵 태세 검토 보고서'에 담겨 있는 대북 응징의 위협을 완화하고 협상을 통한 사태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우리가 원치 않는 전쟁을 미국 혼자서 치를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한다. 북한이 KEDO 사업과 제네바 합의 체제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도록 초당적 노력을 통해 KEDO 사업을 지원해줘야 한다. 이와 관련, 30억달러에 달하는 우리측 잔여 분담금 확보는 필수적이다. 또한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위기 극복을 위한 대미·대북 외교 노력을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03년의 안보위기론은 단순한 허구나 기우가 아니다. 월드컵·아시안게임, 그리고 12월 대선 모두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핵 위기를 능가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재발을 막기 위해 여야간의 공조는 물론 남북, 그리고 한·미·일 3국 공조가 원활히 이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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