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 실체 밝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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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과연 음모(陰謀)가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경선 윤곽이 잡히면서 정치권 안팎의 관심이 여기에 쏠리고 있다.

지금 얘기되는 음모론이란 각 후보 진영의 선거책략이 아닌,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치 불간섭을 선언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선거구도에 어떤 식으로든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른바 김심(金心)이 의도를 갖고 가깝게는 민주당 후보 선정에서 궁극적으론 한나라당 후보 당선 저지에 나서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따라서 이 음모론은 정계개편까지를 포함하는 방대한 내용인데 현 단계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게 밀려온 이인제 고문 대신 노무현 고문을 띄운다는 게 골자다.

만약 음모론이 실재한다면 청와대가 정치적·도덕적 결정타를 맞는 것은 물론이고 선거판이 기본부터 흔들리는 사태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민주당 내부의 경선 불복 시비와 인위적 정계개편 시도에 대한 야당의 전면 공세 등으로 정국이 일대 혼란에 빠질 것도 자명한 노릇이다.

그러나 혐의의 당사자인 청와대측은 김심은 무심(無心)이라며 음모론을 전면 부정한다. DJ가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항간에 나도는 '盧후보가 향후 DJ를 덜 밟을 것'이라는 음모설 가동의 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후계자를 키워 덕본 대통령이 있느냐는 반문으로 응수한다.

하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층도 상당수다. 정치 관련 DJ의 언약이 언제 그리 지켜졌느냐는 불신의 경험칙과 함께 DJ가 외면하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더라도 바람이 부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의혹은 의혹을 낳게 마련이고 특히 수세적인 이인제 후보 진영이 음모론을 흘리면서 확산일로에 있다.

정치권 이면에 잠복하던 음모론이 표출된 것은 유종근 전북지사에 의해서다. 수뢰 혐의로 구속되기 전 柳지사는 경선을 중도 포기하면서 그간 권력 실세에게서 후보 사퇴 압력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머지않아 한화갑 후보도 사퇴할 것이라고 예고했는데 이게 맞아 떨어지면서 음모론은 확산되고 있다. 이후 '보이지 않는 손'이 기대하는 대로 '노풍(盧風)'이 일었다는 것이고, 李후보 진영에선 악재가 이어졌다는 게 음모론의 전개과정이다. 李후보의 핵심 참모인 김운환 전 의원이 오래 전 사건의 수뢰 혐의로 구속되고 盧후보를 띄우는 일련의 여론조사 결과가 집중보도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떠도는 음모론을 뒷받침할 확실한 자료는 아직 없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감도 없지 않다. 때문에 대세론을 지킬 수 없게 된 李후보측이 경선을 거부하기 위해 명분을 축적하는 것이라는 회의적 시각도 있다.

근거없는 음모론이 나도는 것 자체가 국가적으로나 정치를 위해 불행한 일이다. 국민적 정치 혐오·불신을 종식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음모론의 진상을 규명하고 조기 진화해야 한다.

정치권, 특히 음모론을 지피고 있는 李후보 진영은 증빙자료가 있다면 즉각 공개해 이로 인한 혼탁과 불신을 일소해야 한다. 세(勢)만회를 위해 일시적으로 낭설을 퍼뜨린 것이라면 응당 국민에게 사죄해야 할 것이다. 기만과 미혹의 음모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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