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이톈카이 중국 부부장의 '뼈있는' 선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추이톈카이(崔天凱)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최근 방중한 외교통상부 고위 당국자에게 "천하에 큰 용기가 있는 자는 까닭 없이 해를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蘇軾)의 시를 자필로 쓴 액자를 선물했다. 추이 부부장이 천안함 사건의 안보리 처리와 관련해 중국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방중한 우리 당국자에게 이 글을 써서 준 것은 "한국의 분노가 크겠지만, 화내지 말고 자제하기 바란다"는 중국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액자는 "천하에 큰 용기가 있는 자는 갑자기 어떤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까닭 없이 해를 당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이는 그의 마음에 품은 바가 크고,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 (天下有大勇者, 卒然臨之而不驚, 無故加之而不怒. 此其所挾持者甚大, 而其志甚遠也)"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한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의 일화를 다룬 소동파의 '유후론(留侯論)' 일부다. 유후는 유방이 한 왕조를 세운 뒤 장량을 유후로 책봉한 데서 나온 이름이다. 유후론에 따르면 장량은 낯선 노인이 신발을 벗어던진 뒤 주워와 신기도록 명령하자 군말없이 따랐고 노인이 새벽에 만나자고 요구하자,전날 밤부터 약속장소에 나와 기다리는 인내심을 보였다. 이에 감탄한 노인은 장량에게 주나라를 멸망시킨 비법을 기록한 '태공병법'을 전수했고, 장량은 이를 이용해 초나라를 물리치고 개국공신에 올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소동파는 "인간의 감정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평범한 사람은 치욕을 당하면 칼을 빼들고 몸을 던져 싸우지만, 이는 용감하다고 할 수 없다(人情有所不能忍者 匹夫見辱 拔劍而起 挺身而鬪 此不足爲勇也)"고 운을 뗀뒤 추이 부부장이 쓴 시구를 이어갔다.

과거에도 중국은 당시나 송시 등을 이용해 속내를 전달하는 '한시 외교'를 구사해왔다. 2004년 2월 베이징에서 열린 2차 6자회담에서 리자오싱(李肇星)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이 엄숙한 짧은 순간에(這一凝重的瞬間) 우리가 평화·우호를 주제로 한 교향곡을 써 연주하기를 기원하네(我虔敬地祝福 把和平與友誼的交響譜成)"라는 요지의 자작 한시를 만찬 석상에서 낭송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선물을 전달받은 당국자는 "추이 부부장이 원래 소동파의 '유후론'을 좋아해 좌우명으로 삼아온 끝에 오랜 친구인 내게 선물한 것으로 안다"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