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평화 막는 유대인 정착촌 : "팔 공격 받을라" 방어벽 구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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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유혈분쟁현장을 취재 중인 이훈범 본지 파리특파원의 생생한 리포트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예루살렘=이훈범 특파원]동예루살렘의 유대인 정착촌 피스캇체프.

미색 석회암 벽면에 붉은 기와를 얹은 우아한 빌라들이 언덕을 따라 줄지어 서있다. 겉보기엔 평화롭기 그지 없는 마을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 머리에 키파(유대교도 남성들이 쓰는 모자)를 쓴 노인들이 산책을 즐기고 있고, 아낙들은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그네를 밀어주고 있다.

하지만 정착촌 주민들의 마음까지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사방이 팔레스타인 마을에 둘러싸여 있어 언제 어디서 '피구임(테러공격)'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18일에도 마을 입구 교차로 버스정류장에서 팔레스타인 청년이 자살테러를 했다. 마을 경계 도로를 지나는 차량에 대한 총기 난사도 드문 일이 아니다.

충돌이 가장 심한 곳은 베들레헴 북부의 팔레스타인 마을 베찰라와 인접한 길로 정착촌이다. 베찰라의 팔레스타인 민병대들이 수시로 길로를 향해 총격을 가해 주민들이 외출을 하지 못할 정도다. 지난해 거리를 걷던 부자(父子)가 팔레스타인 민병대의 총격으로 사망한 이후 마을 경계에 콘크리트 방어벽을 설치했다.버스를 기다리던 아얄론이라는 청년은 "위험하니 방어벽 밖으로는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착촌 건설을 멈추지 않고 있다. 피스캇체프의 경우 입주가 안된 빈 건물이 수두룩한데 계속 아파트를 짓고 빌딩을 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이스라엘 정부의 입식(入植)정책 때문이다. 아리엘 샤론 총리가 집권한 지난해 2월 이후에만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기구에 34개의 정착촌이 신설됐다.

정착촌 건설은 광야에 우선 도로를 낸 뒤 작은 도시를 만들고 점차 외곽으로 확장해 인근 아랍주민들을 몰아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정착촌 주민들에게는 각종 세제 혜택을 준다. 이스라엘의 아드바 연구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정착촌에 대한 보조금은 주민 1인당 연간 2천3백15셰켈(약 70만원)로 다른 유대인 거주지역(1천1백27셰켈)의 두배에 달했다.

정착촌 확대는 주로 동예루살렘에 집중되고 있다.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더라도 예루살렘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착촌 거주 유대인 인구 25만명 중 20만명이 동예루살렘 지역에 몰려 있다. 정착촌은 팔레스타인에 넘겨줘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집값이 오르지 않아 투자가치가 떨어지지만 막대한 국가보조가 건설붐을 유지시키고 있다. 각종 탈법 사례도 적당히 눈감아준다.

"4층 빌라의 일부를 콘크리트로 막아 2층 건물로 준공검사를 받은 뒤 막은 것을 헐어내고 사용하는 사례가 많다"고 피스캇체프의 한 팔레스타인 인부는 귀띔했다.

밀려나지 않기 위한 팔레스타인측의 대응도 눈물겹다. 정착촌의 길목에 건물을 지어 확장을 막기도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아랍인들이 정착촌 주변 건물을 매입할 경우 은행융자를 받도록 도와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모하메드 바흐압은 성한 유리창이라고는 한장도 남아 있지 않은 빈 건물들을 가리키며 "이스라엘의 침략을 저지하는 무인 기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땅따먹기' 경쟁으로 예루살렘은 이미 동·서로 가르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누가 봐도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아름다운 정착촌들은 팔레스타인측의 입장에선 평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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