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인기순위 프로 빼닮아 가는 TV의'좋은책'선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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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1등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름다운 꼴찌'라는 말은 애정 어린 위로거나 순진한 자기 위안인 경우가 많다. 어느 분야든 순위 매기기는 지대한 관심사다. 순수와 대중을 불문하고 문화도 마찬가지다.

3월 첫째주 베스트 셀러 국내 서적 순위를 보자. 대한출판문화협회 등이 집계하는 이 순위에서 1위는 박완서씨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2위는 공지영씨의 소설 '봉순이 언니'가 차지했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 많던…'은 발간된 지 10년이 된 책이며, '봉순이 언니'역시 나온 지 4년이 된 작품이다. 무슨 이유로 이 책들이 2002년 3월에 나란히 1,2위를 차지했을까.

이유는 단 한가지다. 한 지상파 TV의 오락 프로그램이 토요일 저녁에 진행하는 독서 권장 코너에서 '좋은 책'으로 뽑혔기 때문이다. 4위를 차지한 김중미씨의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 역시 이 코너에서 권한 책이다. 이쯤되면 한국의 책 시장은 그 오락 프로그램이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해 없기 바란다. '그 많던…' 등의 작품성에는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미안하지만 일개 TV 오락프로그램이 베스트 셀러 순위를 결정하는 일은 결코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책을 읽자는 캠페인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한국 외에 어느 문명 국가에서 TV 오락프로그램이 책 시장을 좌지우지한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이런 현상은 척박한 독서 풍토의 적나라한 반영일 뿐이다. 순기능도 있겠지만 악기능도 필연이다.

왜 노래누리가 책 이야기를 꺼낼까. 한국의 음반 시장이 이미 그런 악역기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지상파 TV의 가요 순위·오락 프로그램들이 한국 대중음악에 끼친 폐해는 재론할 필요도 없다. '음반이 많이 팔려 1등이 되는 게 아니라 1등을 하면 많이 팔린다'는 비판이 공감을 얻는 상황이다.

또 '좋은 책' 선정과정의 공정성과는 별개로 선정 기준에서 어떤 문화적 획일주의의 혐의가 느껴진다. 그런 획일주의의 상업적 확산은 더욱 두렵다. 박완서씨의 '그 많던…'은 '좋은 책'이고 장정일씨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나쁜 책'인가.

지난해 15만장의 앨범이 팔린 록밴드 크라잉넛은 TV에서 볼 수 없는데 그 몇분의 일도 안 팔린 '인기 가수·그룹'들은 브라운관을 전세내다시피 하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대중음악과 지상파 TV의 왜곡된 관계가 자칫 도서 시장으로 확대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기우로 끝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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