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좌절위기에 몰린 '대만 독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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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미 관계와 동북아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결정적 변수의 하나는 대만 문제다. 2000년 천수이볜(陳水扁)총통이 당선된 이후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과 '대만 독립'을 놓고 팽팽한 긴장을 유지했고, 미국은 '대만 카드'의 지렛대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구사해 왔다. 이것은 또한 북한 핵 문제의 처리 순서와 방식에도 미묘한 변화를 줄 수 있는 복병이었다.

이런 점에서 지난 11일 치러진 제6대 대만 입법원 선거는 국제적 이해관계가 동시에 걸린 천 총통의 대만 독립노선에 대한 중간평가 성격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건국 이후 55년 동안 의회를 장악해 온 국민당의 아성과 '여소야대' 질서를 동시에 해체함으로써 대만 독립운동을 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가 하는 시금석이었다.

그러나 범 대만독립계열(綠派)이 역사상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확보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현상 유지와 대중국 협상을 강조한 야당연합(藍派)이 다시 의회를 장악했다. 이로써 2006년 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고 2008년 새 헌법을 시행한다는 민진당의 대만 독립구상은 좌절될 위기에 놓였고 국민당 부정재산 환수, 정경유착 근절, 병역기간 단축 등 '개혁입법' 통과도 불투명해졌다.

그렇다면 왜 민진당이 패배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대선거구제에 대비한 후보 전술의 실패, 지지기반인 청년층의 투표 불참, 당내 복잡한 계파정치에 대한 실망감 등 민심을 정확하게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선거 1주일 전 대만의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겠다거나 재외공관과 국영기업 명칭을 중화민국에서 대만으로 고치겠다는 이른바 '정명(正名)운동',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을 염두에 둔 급진적 대만 독립 시간표는 중간층의 이탈을 가속화했다.

선거 이후 대만정치는 양분된 국론과 이념적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2000년 대선 결과를 아직도 승복하지 않는 뿌리 깊은 구원(仇怨), 여야 상호 간의 한 치 양보 없는 치열한 비방전, 선거 직전 터진 타이베이(臺北) 열차사고에 대한 흑색선전과 음모설,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대만 사회의 분열과 갈등, 대만해협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전운과 국민의 경제불안이 반복돼 왔다. 59.2%라는 역대 최저 투표율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대만형 '동거정부(cohabitation)'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여소야대' 정국을 반전시키지 못한 민진당은 야당의 협력 없이 대만 독립이나 개혁입법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야당연합에 내각구성권을 주면서 상생의 정치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리덩후이(李登輝)가 이끄는 대만연합과 같은 급진적 독립그룹이 후퇴하고 국민당 내에서도 온건그룹의 입지가 넓어지면서 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다만 야당연합이 1992년 '국가통일강령'으로 되돌아가 대만 독립운동을 무력화할 가능성 때문에 민진당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는 선거 직후 천 총통의 정치력을 시험하는 첫번째 바로미터다.

대만 입법원 선거 결과는 긴장의 연속이었던 양안 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만 독립그룹은 '본토화 전략'이 약 45%의 지지 기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그 깃발을 내리지는 않겠지만 그 탄력성은 크게 둔화될 것이다. 따라서 천수이볜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과 '실질적' 대만 독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도 과도한 '대만 독립운동이 민의를 잃었다(物極必反)'고 하여 선거 결과를 내심 반기면서 '이야기를 듣고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聽其言觀其行)'고 해 대만에 공을 넘겼다. 이제 그 반응에 따라 '제3차 국공합작'이 나타날 수도, 전쟁의 그림자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희옥 한신대 교수.중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