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휩쓸고 간 뒤에 주위에는 이렇듯 어른들의 상처 같은 가책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아이들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언제나 밥상머리에서나 우리 집에 잠깐 마을을 와서도 자리에 앉기만 하면 고개 숙여 일단 기도부터 올리던 영식이네 그 창백한 어머니. 내가 영식이를 찾으러 갔다가 몇 번을 불렀는데 그의 매형이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가 아주 짧게 "없다"라고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는데 그 차갑고 귀찮은 듯한 시선이 왠지 오랫동안 인상에 남았다.
태균이는 바로 우리 집 앞의 배추밭 건너편, 그러니까 쌍성루 벽돌담에 잇대어 있는 작은 한옥에 살던 애다. 집은 우리 집처럼 기와를 올렸는데 판자 울타리의 대문 위에는 함석으로 멋진 처마를 휘어지게 만들어 올려놓았다. 문간 바로 옆에 그 애 할아버지의 공방이 있었다. 아버지는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의용군에 나갔는지 납북되었는지 애매하다. 아무튼 그냥 보통 백성으로 젊은 사람이었으니 납북까지야 모르지만 군대에라도 끌려갔는지 모르겠다. 태균이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라서 내 어머니도 그이 칭찬을 하곤 했다. 어머니는 개가를 서슴지 않던 '이남 여자'들과 달리 그이가 점잖고 기품있는 여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녀는 서울의 서민 아낙네답게 머리를 물빗으로 단정히 빗어 비녀를 꼽고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에다 앞치마를 두르고 혼자 있는 시아버지 세 끼니 봉양하고 밭에 나와 야채를 가꾸어 살림에 보탰다. 우리 철없는 것들은 그녀가 파고 모아둔 거름구덩이에 종종 빠지고는 그 집을 욕하고 저주하곤 했다. 태균이 할아버지는 상투에 망건 쓰고 공방에 들어앉아 물소 뿔을 깎거나 주석 무늬를 잘라내곤 했다. 나도 몇 번 그 공방에 들어가서 아름답고 기묘한 공예품들을 본 적이 있었다.
태균이는 나보다 두세 살 위라서 내가 그를 형이라고 불렀다. 보통 때에는 대들거나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그는 짓궂은 편이었고 자기 또래의 동회장 아들과 같이 있을 때면 우리 아랫것들을 놀리고 괴롭혔다. 어느 날 그가 나를 골리기에 분김에 돌을 주워서 던졌더니 '애고 잘코사니야' 정통으로 태균이 머리에 맞아버렸다. 태균이가 터진 머리를 한 손으로 쥐고 나를 잡으려고 쫓아왔고 나도 죽자사자 달아났다. 내가 집으로 헐레벌떡 들어서는데 마침 출타하는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아버지는 "이 녀석 앞 좀 보고 다녀" 하면서 내 머리에 알밤을 때리고는 길에 나섰는데 그때에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