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69) 장제스·다이지타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고시원장 시절의 다이지타오. 다이지타오는 중국 공산당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세계관이 다르다며 창당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장제스 집권 후 20년간 고시원장을 역임했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철수하기 직전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인생을 마감했다. 김명호 제공

다이지타오는 16세 때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봄 일본 사관학교에 재학 중인 장제스를 만났다. 장이 네 살 위였다. 장은 동향 의식이 유난히 강했다. 다이는 본적이 장과 같았다. 옆모습도 비슷했다.

두 청년은 쑨원의 거처를 자주 드나들었다. 쑨은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의 보호를 받으며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다 보니 흑룡회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오래 배겨 나지 못했다. 단 여자들에게는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흑룡회는 신엔 미치코(津淵美智子)라는 여인을 고용했다. 하녀학교 출신으로 뭐든지 잘 베푸는 성격이었다. 미치코는 다이지타오와 가까이 지냈지만 장제스와도 친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두 사람은 귀국했다.

중국은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의 천하였다. 쑨원은 허울만 좋은 국부였다. 상하이에 정착한 다이지타오는 “난세의 붓은 제아무리 비단 같은 글 수백만 편을 토해 내도 총 한 자루만 못 하다”는 것을 통감했다.

장제스는 아이들을 좋아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 유아원을 자주 방문했다. 김명호 제공

1913년 쑨원이 무장폭동을 일으키자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쑨의 추종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다이와 장의 목에도 현상금이 걸렸다. 함께 추억의 도시로 도망쳤다. 도쿄에서 미치코와 재회했다. 생활비도 줄일 겸 방 한 칸을 빌려 셋이 같이 살았다. 미치코는 도망 온 주제에 온갖 큰소리는 다 쳐대는 두 사람을 입혀 주고 먹여 줬다. 빼놓았던 금반지가 없어져도 모른 체했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가 죽자 장과 다이는 중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혼자 남은 미치코는 10월 6일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장제스와 다이지타오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상하이의 증권교역소에서 브로커 노릇를 하며 한동안 자유분방한 생활을 했지만 타고난 기질들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이는 마르크스주의를 적용해 중국의 윤리 문제를 연구하고 쑨원 학설을 토대로 다이지타오주의(戴季陶主義)의 틀을 완성해 나갔다. 중국 여인을 만나 결혼도 했다. 부인은 근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한 번 화가 나면 맹수와 같았다. 별명이 사자(獅子)였다. 장은 10여 년 후 도래할 황금 10년(黃金十年)의 청사진을 그리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경제학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1920년 가을, 생각지도 않았던 날벼락이 두 사람을 덮쳤다. 장제스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미치코가 서너 살 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장은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다이지타오의 혈육을 데리고 왔다”는 미치코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튀어 나갔다. 몇 층만 올라가면 다이의 집이었다.

다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누가 들을세라 장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모두 황당했던 과거의 일들이다. 한때의 풍류, 생각도 하기 싫다. 지금은 처자가 있다. 너도 알다시피 얼마나 사나운지 모른다.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내 인생은 그날로 끝난다. 내 주소도 모르고 찾을 방법도 없다고 해라.”

장은 다이가 시키는 대로 둘러댔다. 다 듣고 난 미치코는 우선 한바탕 울어댔다. “두 놈 다 형편없는 놈들이다. 자신의 혈육도 필요 없다니 나도 필요 없다”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도 황급히 쫓아 나갔지만 종적이 묘연했다.

장제스는 미치코가 팽개치다시피 하고 간 사내아이에게 웨이궈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족보에도 올렸다. 생모가 누구인지는 적지 않았다. 고향에 보내 첫 번째 부인과 두 번째 부인이 3개월씩 돌아가며 키우게 했다.

장웨이궈가 누구의 친아들인지는 두고두고 중국인들의 화젯거리였다. 1989년 장웨이궈는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나도 모른다. 궁금하지만 밝혀낼 방법이 없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어 “장제스의 아들이어도 좋고 다이지타오의 아들이어도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 여부를 증명해 줄 사람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인들은 수천 년간 야사(野史)가 정사(正史)를 압도해 왔다. 앞으로 무슨 얘기들을 사실처럼 믿을지 장담 못 한다.

김명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