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정복 한발 앞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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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부자 나라인 미국에서 흔한 병인 덕분일까. 10년 전만 해도 난공불락의 불치병이었던 에이즈에 완치의 가능성이 구체화되고 있다.

해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쏟아붓는 에이즈 연구비만 2천억달러에 달한다. 에이즈 연구 과정에서 각종 바이러스 치료제가 잇따라 개발돼 간염이나 독감 등 다른 바이러스 질환마저 덤으로 치료가 가능해지고 있다.

최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에이즈학회는 첨단 에이즈 치료제의 경연장이었다. 이 중 가장 주목받은 치료제는 T20. 1998년 미국의 제약회사 트라이머리스에서 개발한 T20의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된 것. <본지 2월 28일자>

임상시험엔 71명의 감염자가 1년 동안 참여했다.

이 결과 기존 치료법인 칵테일(약제 혼합)요법은 혈액 중 에이즈 바이러스 감소 폭이 74분의 1이었던 반면 T20은 4백16분의 1이었다.

칵테일 요법보다 6배 가까이 바이러스 양을 줄인 것.면역력의 지표가 되는 림프구도 칵테일 요법은 혈액당 평균 90개가 증가한 반면 T20은 1백47개나 증가했다. 주사 부위가 붓고 아파 도중에 접종을 중단한 3명을 제외하곤 특별한 부작용은 관찰되지 않았다.

수백명의 감염자를 대상으로 한 마지막 대규모 임상시험(3단계)에서도 이같은 결과가 재현된다면 이르면 연말께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공인을 받아 시판될 수 있으리란 전망이다.

T20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시판 허가를 받은 에이즈 치료제와는 작용 기전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15종의 에이즈 치료제가 시판 중이며 이들은 모두 면역세포 안에서 에이즈 바이러스의 증식에 관여하는 효소들의 작용을 차단해 에이즈를 치료한다. 그러나 T20은 바이러스가 세포막을 통해 침투하는 과정 자체를 원천 봉쇄한다.

<그림 참조>

칵테일 요법 등 기존 에이즈 치료의 가장 큰 문제는 장기 투여시 30~40%의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바이러스의 내성(耐性). 이 경우 치료해도 바이러스가 죽지 않고 증식한다.

T20은 내성을 보이는 감염자에게 특히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크릭시반 등 3~4개의 약제를 하루 수십알씩 복용해야 하는 칵테일 요법 대신 한가지 약만을 투여해도 충분하다는 것도 T20의 장점이다.

단점이라면 당뇨환자의 인슐린 주사처럼 매일 두 차례 주사를 해야 한다는 정도다. 이번 학회에선 T20 외에도 BMS 805와 S-1360 등 가능성이 엿보이는 신약 후보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서울대 의대 감염내과 오명돈 교수는 "90년대 중반 에이즈 바이러스를 길들일 수 있게 된 칵테일 요법이 등장한데 이어 최근 내성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게 된 T20 등 신약들이 좋은 임상시험 결과를 보여주고 있어 에이즈 완치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신약들을 국내 감염자들이 이용하기 위해선 앞으로도 수년 이상 소요되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을 전망이지만 '에이즈〓불치병 또는 난치병'이란 고정관념을 깰 수 있게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홍혜걸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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