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내 삶이 곧 한 세계임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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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문학동네, 293쪽, 8800원

소설가 조경란(35)씨의 네번째 소설집 『국자 이야기』에 실린 작품들은 느슨한 상태에서의 가벼운 독서를 허용하지 않는다. 긴장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맥락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과 때때로 의미 없어 보이는 문장에 빠져 어리둥절해지기 십상이다.

평론가 김화영씨는 책 뒷표지에 붙인 해설에서 조씨 소설이 “독자의 ‘욕망의 소설’과 맺는 특유의 어긋남의 관계를 통해 거의 위험할 정도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나타남과 사라짐을 반복한다”고 설명했다. 해설에 대한 해설이 필요할 것 같다. ‘독자의 ‘욕망의 소설’’이란 독자들이 소설에서 기대하는 또는 욕망하는, 바람직한 요소들을 갖춘 소설일 게다. 그 요소들이 재미든 교양이든 인생에 대한 어떤 성찰이든. 한데 조씨 소설은 그런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이다. 소설의 의미와 메시지, 실체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가령 단편 ‘100마일 걷기’를 줄거리로 요약해 놓고 보면 엉뚱한 얘기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극도의 무력감에 빠진 나는 언제부턴가 정처없이 걷기 시작한다. 하루는 목이 너무 말라 불쑥 S백화점에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무작정 올라가다가(사실은 지하 식품매장을 찾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9층에서 악어를 만난다.

악어보다 눈길을 끈 건 악어 옆에 있는 그녀였다. 어느새 함께 걷는 사이가 된 그녀는 나에게 11년 동안 키우던 거북이가 죽었는데 어디다 묻어야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는다. 집 근처, 근무하는 백화점 부근 어디에서도 묻을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거북이를 냉장고에 3개월째 보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는 거북이를 그녀의 집 근처 골목 모퉁이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좁은 땅에다 묻어주지만 거북이가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는 다시 파낸다.

결국 그녀는 거북이를 고향 어머니 산소 곁에 묻어준다. 그녀가 돌아온 날 나는 숨 넘어가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목을 조른다. 하지만 산소를 이장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녀는 고향으로 다시 떠난다.

58쪽 분량의 긴 소설 ‘입술’의 주인공 그는 세상에서 가장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결코 성공적이지는 못하다. 어느 날 그는 날치기당한 후 버려진 가방을 찾아준 게 인연이 돼 만난 여자로부터 “나도 입술이 두 개랍니다”라는 고백을 듣는다. 다른 입술 하나는 왼쪽 무릎 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도’라는 표현은 그도 그렇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그는 “여자의 입술, 그의 입술, 그래서 네 개의 입술, 두 개의 입”이 “하나의 영혼”이 되는 순간을 상상한다. 하지만 여자가 죽은 후 동거남에게 들은 얘기는 여자의 입술은 하나뿐이었다는 것이다.

조씨의 소설들 안에 담겨 있는 세부 항목들, 가령 인물 내면의 변화와 흔들림, 환상적인 요소, 상징적인 문장 등을 남김없이 명백하게 해명하거나, 그것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조씨가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그렇게 평면적이지도 않다.

‘100마일 걷기’와 ‘입술’은 남녀 사이의 소통과 단절의 양상을 다뤘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특히 ‘100마일 걷기’의 나는 남녀 관계에서도 ‘적게 주고 적게 기대하는 사이’를 꿈군다. 반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매번 다 주고 큰 것을 기대하는 관계다. 어쩐지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인 차이로도 느껴지는 대목이다. 어쨌든 나는 여자의 바람대로 거북이를 묻는다.

‘잘자요, 엄마’에서는 가족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홀로 남게 되고 그나마 집도 머지않아 비워줘야 할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화자의 꿋꿋함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소설들은 한결같이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성찰로 끝을 맺는다. ‘국자 이야기’의 주인공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의 삶은 그것으로도 이미 한 세계이며 나의 의지가 그 세계를 관통하리라고 믿는다”고 다짐한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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