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에 허탈 속 자성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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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정부 안 그대로 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자 재계가 매우 허탈해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선 자성론도 강하게 일고 있다. 시장경제체제의 유지와 반기업 정서 해소를 위해 재계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느냐는 지적이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연구조정실장은 "프로야구 선수 한 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기업들은 수십억원을 투자하면서도 자신들의 생존기반인 시장경제체제의 유지를 위한 투자엔 정작 너무 인색하다"고 강조했다.

◆ 허탈한 재계=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이날 "허탈하다"면서 "기업 의견을 묵살하면서 어떻게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다른 재계 고위 관계자는 "이제 정부나 정치권은 기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비판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한 재계의 의견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계가 당초 주장을 접고 절충안까지 냈음에도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원안을 글자 하나 수정하지 않고 통과시켰다. 올해 내내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막기 위해 총력전을 벌이다시피한 재계이기에 허탈감은 더하다.

전경련 관계자는 "올해 77세인 강신호 회장이 열린우리당의 '젊은'386의원들과 공식적으로 만난 것도 세 차례"라면서 "정당 대표와 의원들의 비공식적인 모임을 합치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음에도 전혀 성과가 없었다"고 밝혔다.

◆ 무엇이 문제인가=재계의 의견이 전혀 수용되지 않자 갖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한 그룹 관계자는 "열린우리당 386의원들의 재계에 대한 반감이 지나치게 강한 것 같다"면서 "아무리 설득해도 재계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민단체의 주장이 강하게 먹힐 수밖에 없는 현정부의 이념적 지평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그러나 재계 고위 관계자는"이유야 어떻든 국민들에게 반기업 정서가 팽배하다면 재계는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했다"면서 "그러나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룹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비판했다.

전경련 고위 관계자도 "국회가 재계 의견을 무시한 데는 반기업 정서 탓이 큰 것 같다"면서 "시장경제체제의 유지와 반기업 정서의 완화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다른 그룹 관계자는 재계의 분열을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수정하기 위해 노력한 기업은 몇몇 그룹에 불과하다"면서 "재계가 단합해 같이 노력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경련은 10일'외국 자본에 의한 적대적 기업 인수합병(M&A) 가능성과 투기성 자본의 폐해 및 대책' 보고서를 통해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면서 "출자규제 등을 폐지하고, 연기금 주식투자를 제한적으로 허용해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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