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정서로는 國益 추구 어려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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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걸작은 무수한 습작에서 나온다."

위대한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말이다. 어떤 예술 걸작도, 발명품도 하루 아침에 천재의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무수한 시도와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외교강국이 되는 것도 경제력과 많은 인재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비스마르크가 외교의 귀재로 불리는 것도 당시 프러시아의 군사력·경제력의 뒷받침은 물론 '빌헬름 스트라세'의 많은 인재 덕분이었다. 평범하지만 끊임없이 경제력을 키우고 인재를 기르는 것이 외교 강국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만이 지닌, 한가지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 국민정서의 극복이다. 국민정서는 최근 한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됐다.

피해의식, 민족주의 내지 국수주의, 쇄국주의, 반미·반일 감정, 평등의식 등이 뒤섞여 국민정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요소 중의 하나가 이슈로 떠오르면 한국의 강력한 국민정서가 발동한다.

국민정서는 국민의식과 다르다. 국민의 뜻과도 다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민정서가 국민의식 또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것으로 쓰이는 경향이 최근 늘고 있다. 그 경우 진실한 국익을 추구하기는 어렵다.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우리 국민과 후손들이다.

한국의 과거는 피해의 역사인 측면이 크다. 그래서 한국의 국민정서는 무엇보다 피해의식에 입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피해의식·국수주의·쇄국주의 등은 19세기적 정서다.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각종 음모론에 시달리게 된다. 음모론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장악하고 있지 못하거나 통제하지 못할 경우 여기에 쉽게 빠져든다. 1994년의 우루과이 라운드(UR)는 우리의 쌀 시장을 개방시키려는 선진국의 음모이고, 97년의 금융위기는 우리의 경제를 탐낸 단기자본가들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불과 한 세대 만에 다른 나라가 한 세기에 걸쳐 겪었던 변화를 경험했다.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의 변천, 이에 따른 인구 80%의 이동(농업에서 제조업과 서비스로), 큰 사회적 진통을 겪으며 일궈낸 민주국가의 실현 등은 세계에서 유례가 별로 없다. 국민정서는 이에 수반된 의식의 괴리에서 오는 우리의 고통인지도 모른다.

국민정서는 과거 국난에 처했을 때 결집력의 원천이기도 했을 것이다. 피해의식과 민족주의에 힘입어 어려운 시기를 버텼을 수도 있다. 올림픽과 같은 국가적 행사를 치를 때 외국인들은 상상도 못하는 국력의 결집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제 보다 더 세련되고 복잡한 선진국으로 질적 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발전과 민주화로 외교강국이 될 기반을 갖췄다. 주변 환경도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틈바구니에서 희생을 강요 당하는 불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약점이 세계화-상호의존의 시대인 21세기에는 능동적 교량 역할을 하게 해주는 강점으로 바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좋은 기회를 이용해 외교강국으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그 첫 걸음은 국민정서를 극복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애국심은 사기꾼의 마지막 도피처다."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냉철한 판단에 기초해야 하는 국익이 국민정서에 의해 좌우되는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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