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빠르긴 한데 허리가 시원찮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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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아무리 스포츠 전문기자라고 하더라도 월드컵 축구대회만 30년 가까이 취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축구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덜한 미국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미국의 축구전문 프리랜서인 제리 트레커(사진)가 바로 그런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본사 장혜수 기자가 지난 북중미 골드컵 축구대회 한미전 취재 현장에서 그를 만나 역대 월드컵에 대한 평가와 이번 한·일 월드컵 전망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

-지난 40년간 월드컵 무대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전세계적으로 축구팬들이 급증했다는 것이다. 월드컵이 가장 큰 스포츠 행사라는 점은 확실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올림픽보다도 더 중요한 행사가 됐다. 내가 처음 월드컵을 취재할 당시 월드컵에 대해 알고 있는 미국인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유럽과 남미에서는 월드컵이 가장 유명한 스포츠 이벤트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이제서야 월드컵의 매력을 맛봤다.

지난 40년간 축구경기는 더욱 빨라졌고 보다 격렬해졌다. 만일 1960년대 축구경기 비디오 테이프를 본다면 당시 선수들의 움직임이 매우 느리고, 공간이 많이 벌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축구는 70년대 독일과 네덜란드가 본격적으로 전술을 연구하면서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두 나라는 과학적 훈련방법과 다양한 공격기법을 개발했다.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전통적 축구 강국과 보통 국가 사이의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다. 월드컵 본선에 오른 32개 팀 가운데 약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위대한 선수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펠레·보비 찰튼·요한 크루이프·미셸 플라티니·디에고 마라도나는 시대가 바뀌어도 대단한 선수들이다. 변한 것은 스트라이커 이외의 선수들이다. 이들은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줄 알고 더욱 강하고 빠르다. 20년 전 선수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다."

-누가 가장 뛰어난 선수였으며, 누가 가장 기대를 저버린 선수였다고 생각하는가.

"단언컨대 프란츠 베켄바워와 마라도나가 각각 자신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 프랑스가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한다면 지네딘 지단이 위대한 선수의 명단에 추가될 것이다. 베켄바워는 다재다능하고 용감하고 훌륭한 리더였다. 마라도나는 혼자 힘으로 경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불세출의 스타다. 패스, 어시스트, 골…. 원하는 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단은 진정한 10번 선수다.

월드컵에서는 늘 기대에 못미친 팀이 있었다. 66년 브라질과 78년 독일이 좋은 예다. 82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마라도나의 활약을 기대했지만 결국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지코는 월드컵을 한번도 안아보지 못한 브라질의 스타 플레이어로 세인들에게 기억될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팀은 70년의 브라질팀이다. 펠레가 마지막으로 참가했던 월드컵 팀이기도 하다. 나는 운좋게도 그들의 경기를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들이 공격할 때의 호흡은 마치 한 사람이 하는 것처럼 척척 잘 맞아떨어졌다. 펠레는 카를로스 알베르토·호베르토 히벨리노·자일징요·게르손 등 뛰어난 선수들의 지원을 받아 그라운드를 마구 휘저었다."

-이번 월드컵에서는 어떤 팀과 선수들이 조명을 받을 것 같은가.

"5개의 대단한 팀이 있다고 본다. 각 팀은 모두 뛰어난 선수를 보유하고 있다. 알파벳 순으로 나열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에는 스피드·묵직함·다양함이 있다. 이 팀의 하비에르 사비올라는 막 떠오르는 스타다. 그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잉글랜드는 '부상군단'에서 거의 벗어났다. 마이클 오언이 월드컵 때 제 컨디션을 발휘한다면 평생 기억에 남을 경기를 보여줄 것이다. 프랑스는 58년·62년 두번 우승할 당시의 브라질과 맞먹는다. 공격 능력면에서 탁월하다. 지네딘 지단은 현재 세계 최고다. 이탈리아는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이뤄져 어느 특정 선수에게 의존하는 팀이 아니다. 82년 이후 최상의 전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잘 뛰어준다면 우승컵을 거머쥘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이다. 한 번도 우승한 적은 없지만 뛰어난 선수들이 많다. 66년이 에우제비오의 해였다면 2002년은 루이스 피구의 해가 될 것이다."

-한국 월드컵 대표팀과 한국 축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국은 월드컵에서 분투할 것이며, 예상보다는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다. 한국팀의 강점은 스피드와 균형이지만 경기의 흐름을 바꿀 줄 아는 미드필더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 약점이다. 골문 앞에서의 자신감도 부족하다. 86년 이후 한국팀을 죽 지켜봤는데 투지 하나만은 대단하다. 한국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는 팀은 없었다. 그러나 세계적 수준의 선수들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최고 수준의 경기를 치르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은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그 승리를 이번 월드컵에서 거두기를 원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미국을 상대로는 거두지 않기를 바란다. 월드컵은 한국 축구 발전의 큰 계기가 될 것이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의 취재 계획은.

"오는 5월 28일 서울로 가 4강전이 있을 때까지 계속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한달 동안 가능한 한 많은 경기·팀·선수들을 지켜볼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월드컵을 즐기고 있는지 알아볼 것이다."

-월드컵 대회의 발전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

"본선 진출국이 32개국으로 늘어나면서 진출국 규모 면에서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앞으로 예선 체제와 관련해 중요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남미축구연맹에 회원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다섯장의 본선 티켓을 주는 데 반대한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북중미의 본선 티켓이 너무 적다. 나는 각 대륙별 본선 직행 티켓 수를 16개로 줄이고 나머지 16장의 본선 티켓은 플레이오프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플레이오프 대진은 제비뽑기로 결정해야 한다. 아프리카 국가가 유럽 국가와 싸우거나,북중미 국가가 남미 국가와 플레이오프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한·일 월드컵이 훌륭한 대회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32개국이 경기를 벌이는 경기장이 균형있게 배분됐다. 5월 31일 개막식의 '위대한 킥오프'가 기다려진다.

LA=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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