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기업 고문변호사들 '한국식 관행'에 황당 "法 있어도 法대로 안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A사는 지난해 11월 황당한 일을 당했다. 국내 H그룹에 물건을 팔았는데, 상품 대금을 공기업인 B사에서 받은 것으로 처리해 달라고 요청받은 것이다.

A사는 임원 회의를 열어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실제로 거래한 적도 없으면서 서류를 조작하는 것은 회사의 윤리강령에 어긋난다며 "안된다"고 통보했다.

A사 고문변호사인 J씨는 "공기업인 B사가 매출을 올려야 하고, H그룹이 B사와 거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물품 거래 서류를 조작하려 했던 것 같다"면서 "외국 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외국 기업들의 국내 진출이 크게 늘고 있으나 이같은 '한국식 관행'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본지가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고문변호사(인하우스 카운슬) 10여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거래 과정에서 탈·불법을 저지르는 사례를 보았다"는 대답이 많았다. 이들 변호사가 지켜보고 경험한 국내 기업들의 문제점을 정리했다.

◇한국선 '법대로'가 어렵다=법은 있지만 '법대로'가 제대로 안된다.

국내 대기업과 납품 계약을 했는데,계약 조건에 문제가 발생했다.

국내 대기업 담당 임원은 전화로 '계약서는 건드리지 않고 세부 내용만 바꿀 수 없느냐'고 문의했다. 계약서를 고칠 경우 윗사람(경영진)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기업(갑)에 납품할 때 가장 큰 어려움은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민·형사상 책임을 납품 업체(을)가 진다'는 내용을 넣으라는 것이다. 국내 기업의 구매 부서가 책임을 피하기 위한 것인데,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 조항을 넣을 때도 있다.

또 한국 기업들은 변호사를 잘 활용하지 않는다. S사가 지난해 외국 기업과 기술 제휴를 하고 국내에 첨단 의류 공장을 설립하기 위해 협상하면서 미국에 보낸 사람은 담당 부장 한명뿐이었다. 반면 상대 회사인 미국 기업은 부사장과 고문변호사·로펌 변호사 두명 등 네명이 나왔다.

외국 기업의 경우 협상 초기부터 변호사가 조언을 해 분쟁의 소지를 없애지만, 한국 기업들은 분쟁이 생겨야 변호사들을 고용한다. 그러다 보니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 기업을 위해 뒤늦게 참여한 변호사는 사건의 흐름을 잘 몰라 외국 기업에 비해 불리한 상황에서 협상을 하게 된다.

◇정부가 더 문제다=한국에는 법과 제도는 있지만, 법규 해석의 폭이 너무 넓다. 외환 거래의 경우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에서 법규 해석을 하지만 담당자에 따라 해석이 서로 다르다. 관련 공무원이 예규 등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액이나 투자 범위 등이 많이 달라진다.

한국은 법보다 사람(공무원)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부 입찰에 참여할 때는 외국인을 포함해 모든 등기이사들의 신원보증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들의 신원보증을 받기 위해 한달 이상 걸리고, 호주 등 일부 국가에서는 신원보증 시스템이 없어 애를 먹는다. 포천지 선정 5백대 기업 정도면 이미 검증받은 사람들이 임원으로 뽑히는데 굳이 신원보증서가 필요한가.

시장에 대한 초법적인 정부의 개입도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큰 걸림돌이다.외국계 투자회사들은 대우사태가 난 뒤 대우 계열사들의 회사채 환매를 정부가 나서서 막은 것에 대해 중대한 '초법적인' 정부 개입으로 여기고 있다.지금도 그런 형태의 정부 개입이 있느냐고 묻는 외국인 투자자가 많다.

정부나 공기업에 더 많은 변호사가 필요하다. 외국에서는 당연히 변호사끼리 하는 협상을 한국에서는 법을 약간 알거나, 아예 모르는 계약담당 공무원과 하게 된다.

◇고용 유연성이 필요하다=노동법이 가장 큰 문제다. 정부는 외국 기업들의 직접 투자 유치를 외치고 있지만, 외국 기업들이 막상 상당한 규모의 투자를 하려다 보면 노동법이 발목을 잡는다. 영업 양도 때의 고용승계 문제다. 반드시 종래와 같은 조건으로 모든 근로자를 인수해야 하는 계약조건 속에서 선뜻 투자하려는 외국 기업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근로자 파견법도 문제가 많다. 경비를 절감하고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외국기업으로서는 국가가 파견근로자를 보호한다고 만든 이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 법은 도리어 파견 근로자를 일정기간 뒤에 해고하도록 만든다. 인력과 시간의 낭비다.

김동섭·표재용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