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가 피운 꽃은 쉽게 시들지 않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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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전도연(29)은 우리 영화계의

재목이다. 여배우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충무로의

숨통을 틔워주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꼭 만나보고 싶은

연예인이 있다면 누구를

지목하겠느냐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배철수."

배철수(49)는 연예계의

걸물 중 한 사람이다.

항상 덥수룩한 모양새에

거침없는 입담, 성대 모사의

단골 대상이지만

남들 앞에 나서거나 인터뷰에

응하길 꺼리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선뜻 전도연과의 만남에 응했다. 한국 영화를 잘 안보지만,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다섯 편 중 세 편이나 본 팬이라는 설명과 함께.

이들의 만남은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시작은 대단히 '언밸런스'해 보였다. 전도연이 6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나타났을 때, 배철수는 혼자였다. 한껏 멋을 낸 전도연 앞에서 "추우니 야외 촬영은 피하자"고 '썰렁하게' 말한 것도 배철수였다. 하지만 불안했던 첫 대면과 달리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둘은 나이와 성별, 그리고 각자의 활동 영역을 넘어 금방 친구 같아졌다.

내 길을 간다

"슬슬 매너리즘을 느끼시진 않나요?"

전도연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포문을 열었다. 12년간 MBC 라디오 음악프로를 진행 중인 배철수를 겨냥한 것이었다.

"난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못하는 성격이죠. 나이 드니 더 그래요. 이 일에 흥미를 잃는 순간 당장 그만둘 거요."

그는 노래를 예로 들었다. 배철수가 1990년 이후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유는 간단 명료하게도 '하기 싫어서'였다. 인기 그룹 '송골매'의 리더로 지내던 80년대, 그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로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음악은 '즐거움'이 아니라 '일'로 느껴졌다.

그는 미련없이 노래를 던져버렸다. 그 후 찾은 행복은 음악 전도사, 즉 디제이의 삶. 그는 "아직도 스튜디오에 들어설 때면 가슴이 설렌다"며 "평생 이 길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전도연이 갑자기 말을 거든다.

"맞아요. 중요한 건 자신이 하는 일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영화를 찍을 때마다 새로운 흥분을 느끼곤 해요. 요새 많은 연예인들이 조로(早老)하는 건 유행에 민감한 사회 분위기 탓도 있지만, 본인들이 진정으로 일을 즐기지 못해서가 아닐까요. 아름다운 중년과 노년의 향기를 발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전도연씨 같은 분들이 잘 해 줘야 합니다. 결혼한다고 금방 은퇴 선언하지 말고…. 그런 분들을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진정 원하는 일을 하고, 하는 일엔 열정을 바치자.' 이들이 의기 투합해 내린 결론이었다.

대중문화의 명과 암

둘은 달변가였다. 특히 대화가 한국 대중문화에 이르자 두 사람 다 눈을 번쩍였다. 평소 그 많은 생각들을 어디에 담아 두고 살았을까.

"우리 음악의 90%를 가요가 점령하고 있어요. 애국심 차원에선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음악의 균형적 발전이란 측면에선 좋은 현상은 아니죠. 댄스 뮤직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지만 록이나 재즈는 전멸 상황이에요. 이 획일화 경향은 분명 문제 있어요."(배철수)

"요즘 국내 영화 전성시대라고들 하죠. 그러나 여기에 거품이 있다는 걸 아세요 ? 아직 제작 여건도 미비한 게 많고요. 영화인들이 스크린 쿼터제를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전도연)

속이 타는지 배철수는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가 획일화 현상은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라며 넘쳐나는 조폭 영화들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 전도연이 짓궂게 웃으며 응수했다."3월1일 제가 주연한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가 개봉하거든요. 이번 영화는 '펄프 누아르(가볍고 통속적인 누아르)'라는 새 형식을 멋지게 연출해 냈어요. 기존의 무거운 누아르와는 많이 틀릴 거예요. 꼭 보러 오세요."

"그 사이 홍보라니 역시 프로답군요.(껄껄껄)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가보죠."

일상으로 돌아가

연예인은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상과 괴리되거나 이미지의 허상 속에서 살기 쉽다는 게 이들의 고민이었다. 전도연은 바쁜 생활 속에서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다 보니 점점 외톨이가 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이에 배철수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무릎을 살짝 쳤다.

"나를 본 많은 사람들이 배철수는 머리도 안감고, 싸움만 하고 다니고, 술도 많이 마실 거라고 하죠. 하지만 나는 내가 그어 놓은 선 밖으로는 잘 나가지 않는 성격이에요. 실제의 난 절제된 삶을 사는 사람인데 남들에게 인식된 이미지가 그렇지 않은가 봐요. 이게 연예인의 이미지라는 성(城)이에요. 선배로서 한마디 충고를 하자면, 이 성에만 갇혀 있다 보면 아예 세상과 고립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는 거죠."

대화는 좀처럼 끝날 줄 몰랐다. 밖이 어둑어둑해지자 전도연은 개봉작 이야기를 다시 꺼냈고, 배철수는 자신의 프로에 출연을 권유했다. 프로 근성은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그리고 나타날 때 처럼 전도연은 한 부대를 이끌고, 배철수는 혼자 터벅터벅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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