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고대 중국에서 천지신명이나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바치던 소를 희생(犧牲)이라 불렀다. 희생이란 말의 본래 의미다. 여기에 요즘 우리가 쓰는 의미가 더해진 것은 은(殷)나라 탕왕(湯王) 때다. 천하의 명군으로 꼽히던 탕왕이었지만 5년 간에 걸친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자 스스로 희생이 돼 기우제를 지냈다. 그가 머리를 깎고 사지를 묶은 뒤 제단 위에 오르자 정성에 감복한 하늘이 비를 내렸다. 이때부터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것을 희생이라 부르게 됐다.
희생양이란 말은 고대 유대인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유대인들은 대속죄일(욤 키푸르)에 염소 한마리를 제비로 뽑아 사람들의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운 뒤 광야로 보냈다. 이 말은 원래 영어 단어에서 보듯 '속죄염소(scapegoat)'였는데 우리말에선 희생양, 혹은 속죄양으로 굳어졌다. 이처럼 집단의 재앙을 막고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신에게 동물을 바치는 의식은 고대사회 어디에서나 있었다. 우리네, 고사(告祀)상의 돼지머리도 이런 의식의 흔적이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실제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남녀 한쌍을 골라 1년간 잘 먹인 뒤 타르겔리아 축제 때 무화과나무 채찍으로 때리며 끌고 다니다 불에 태워 죽였다. 이를 통해 자신들은 정화된다고 믿었다. 중세 서양의 마녀사냥이나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도 종교적·정치적 목적의 희생양 만들기였다.
이에 대해 『희생양』을 쓴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사회가 혼란해지면 집단은 희생양을 찾게 되고 이를 통해 다시 뭉친다"고 말했다. 나아가 국내에 문제가 있을 때 국민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같은 모험적인 외교정책을 선택하는 것을 미국의 국제정치학자 잭 레비 교수는 '희생양이론', 또는 '전환이론'으로 설명했다.
얼마 전 경질된 외무장관이 한·미관계의 희생양이란 외신보도가 있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발언으로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그를 희생양으로 택했다는 것이다.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다 북·미간 갈등까지 맞물려 한반도 전체가 새 국제질서의 희생양이 되는 일은 결코 있어선 안된다. 레비 교수의 이론대로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한반도에서 희생양을 찾겠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